작성일 : 24-11-29 10:29
[191호] 시선 하나 - 자살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 재정립에 관한 연구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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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 재정립에 관한 연구

김성길

1. 들어가는 글


우리나라는 2003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2017년 한해를 제외하고) 부동의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산업구조가 종래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노동력 구조가 가속화될 것이고, 대면 업무의 증가를 초래하여 직무 스트레스에 놓인 근로자들이 더 늘어나 자살률이 더 심각해질 우려가 크다. 문제는 우리 법제가 자살은 원칙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의성’이 내재하였다는 이유로 업무상 재해를 부정한 뒤, 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 기준)는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이뤄진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업무상 재래를 인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업무상의 사유가 분명한 경우라도 자살이라는 이유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산재보험법의 입법목적에 부합할 수 없다. 이러한 의문점에서 시작하여 자살이 다른 업무상 사유로 인한 재해와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증명한 뒤, 나아가 타당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인정 기준의 재정립을 위해 필요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2. 우리나라 자살의 업무상 재해인정기준

자살하거나 시도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정신과적 장애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의학문헌에 따르면 가장 많은 것이 우울증으로 80%, 그 다음 정신분열병 10%, 나머지는 치매 또는 섬망 상태가 5%이다. 따라서 자살자의 상당수가 정신질환을 동반하고 있다면, 자살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의도한 고의가 아니라 병적 상태에서 이뤄지므로 온전한 ‘고의’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의학상 질병의 발병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아니한 질병은 법원의 판례 등으로 인정 기준이 정립된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법원이 증명책임을 완화하더라도 그 인과관계를 인정받기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첨단산업장에서 새롭게 발생한 ‘희귀질환’인 경우, 그 원인을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피재근로자 측에서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신질환은 대부분 발병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아니한 영역이다. 그러한 점에서 정신질환의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다.

현행 산재보험법 제37조는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한 행위로 발생한 것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정상적인 인식능력’의 저하와 ‘정신적 이상 상태’가 정신병적 증상인 환각이나 망상 등이 동반되는 수준의 심각한 상태를 상정하고 있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 판례는 우울증 에피소드에 준하는 수준의 심리적 변화 등으로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다만, 현행법은 자연과학적 진보를 반영하지 못한 현실과 법의 괴리를 보여줄 뿐이다. 판례에서 다소 완화된 기준을 통해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분명한 일이지만 현행법 해석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여 일부 판결이 사회평균인 기준설을 취하는 등 법적 안정성 역시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3. 민법상 손해배상 원리와 산재보험과의 부적합성

산재보험법은 무과실책임주의를 따르고 있고, 이러한 무과실책임주의는 위험책임에 근거하므로 고의 또는 과실 같은 귀책이 요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연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에 의한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는 제도와 그 취지나 목적을 달리하는 관계”라며, 생활 보장적 성격을 강조한 뒤. “사용자는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그 전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근로자에게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비율에 상당한 금액의 지급을 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를 배상액에서 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결국, 산재보험법에서는 손해를 발생시킨 가해자를 찾아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민법의 손해배상 법리가 아닌, 산재보험법의 보호 범위를 규범적으로 확정하는 법리여야 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법명만 보더라도 ‘배상’이 아닌 ‘보상’에 관한 법이기에 산재보험제도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과관계 이론이 필요한 것이다.

독일의 ‘중요조건설’은 “장래에 발생한 결과에 대하여 일정한 조건이 유일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결과 발생에 개입했던 모든 조건 가운데 그 일정한 조건이 다른 조건들에 비하여 본질적이었을 때에만 법률적 인과관계를 인정”한다. 이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에 기초한 조건설이 모든 조건을 동일한 가치로 보는 것과 차이점을 가지며 상당인과관계설에서의 ‘상당성’이 인과관계 유무의 판단기준이었던 점과 달리 ‘중요조건설’은 결과 발생에 ‘중요성’이 그 판단기준이 된다.

독일의 경우 자살의 인과관계를 ‘중요조건설’에 따라 검토하므로 2단계의 책임설정적 인과관계 그리고 책임충족적 인과관계로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자살에 있어서 사고 개념 결핍은 빈번히 초래되고, 자연과학적으로도 자살에 있어 전통적인 사고 개념 아래에 포섭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판례에 접목되어 점차 의지침해에서 의사형성 능력의 저하로 바뀌었다. 1982년에는 의사 형성 능력의 저하가 결핍된 경우에도 업무상 재해가 자살의 유일한 원인이었던 경우 이른바 청산자살을 인정하였다. 더 나아가 1990년에는 의사 형성 능력의 저하가 결핍된 경우일지라도 업무상 재해의 영향이 유일한 것인지를 묻지 않고 공동원인에 이르기까지 산재보험의 인정 필요성을 긍정하였다.

프랑스는 사회보장법전 제L.411-1조에 의해 이른바 ‘책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데, 논리상 근로계약에 따른 근무 시장 중 업무 중 발생 된 사고 또는 그 결과로써 발생한 것이라면 달리 사용자나 건강보험공단이 반증하지 않는 한 업무상 사고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기원은 2002년 2월 28일 “고용주가 직원이 노출된 위험을 인지했거나 인지했어야 하는 경우,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사회보장법 제L.452-1조의 의미 내에서 변명할 수 없는 과책의 성격을 갖는다.”라며, 변명할 수 없는 과책의 요소를 오로지 ‘위험에 대한 인식’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 사용자는 소속 근로자를 보호할 기본적 의무가 있어 현실화한 위험이 산재 인정 절차 중 확인되면 자동적으로 사용자의 변명할 수 없는 과책이 성립되는 점은 시사점이 크다. 이를 적용하면 사용자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의무 또는 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한 경우, 그 즉시 변명할 수 없는 과책이 인정되는 결과가 성립되어 결과적으로 업무상 재해의 인정에 도움이 된다.

자살은 피재근로자의 피보험 활동 행위에서 직접 의도하여 자살한 것이 아니라서 예견 가능성을 전제로 상당인과관계설로 ‘사망과 업무와의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산재보험법의 목적이 피재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보장에 이바지하는 것이기에 ‘생활보장’이 논의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용자의 배상책임을 대위한다는 인식을 넘어 피재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하므로 재해 인정에 관한 인과관계 이론을 산재보험제도와 부합하게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4. 입법론적 해결방안 검토

인간의 노동은 육체와 정신이 온전한 인격체를 전제로 한다. 근로계약에 따라 근로제공을 하는 근로자에게 사용자는 안전을 배려해야 하는데, 그 배려 대상은 육체만이 아닌 정신을 포함한 인격체가 주체가 된다. 따라서 근로계약에 별도의 약정이 없더라도 신의칙상 사용자는 근로계약에 정한 근로 시간이 종료되고 나서 온전한 인격체로 다시 근로제공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할 의무가 따른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안전배려의무 내용 중 핵심이 되는 최저한의 기준을 법으로 정한 것이므로 법률에 규정된 사용자의 안전조치 의무 및 보건조치 의무를 수행하지 아니하여 근로자의 건강손상이 발생한 경우, 이는 사용자가 ‘인지했거나 인지했어야 하는’ 법정의무를 준수하지 아니하여 발생한 산업재해(근로자의 건강손상)이므로 증명책임의 전환을 통해 근로자의 두터운 보호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5. 마치며

필자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업무상 재해를 당한 피재자에게 놓여있는 증명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목적에 따라 피해자에게 신속·공정한 보상이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사실적 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을 전환하고, 그 인과관계는 종래의 상당인과관계가 아닌 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판단기준을 새로이 정립할 것을 제안하고자 함이다.

끝으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인 것을 헤아리고, 이를 누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고자 하는 바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본 글은 지난 10월 31일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연구소’에서 진행된 <제21차 울산인권포럼>에서 김성길 노무사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김성길 님은 노무법인 더휴먼 공인노무사이며, 2024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