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7-03 22:10
[150호] 여는 글 - “일하는 그대, 리스펙”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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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그대, 리스펙”

이선이


지난 4월 초쯤, 세종시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살짝 알고 지내던 울산 MBC PD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울산 MBC에서 노동절 특집으로 노동인권에 관한 토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데, 게스트로 나와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습니다. 당장 일주일 후에 녹화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저에게까지 섭외요청이 온 걸 보면 PD님도 급한 사정이 있으신 듯하고, 제가 민주노총 법률원에 몸담고 있다 보니 노동인권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데 차마 거절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대본은 있는 거지요?”라고 물었더니 “그럼요” 하시길래 “그러면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녹화하는 날 아침부터 촬영장에 가서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신부 화장을 받고, 어색함에 몸부림치며 출연자들을 둘러보는데 완전 주눅이 들었습니다. 뉴스에서나 보던 울산 MBC 아나운서에, 책을 열 몇 권을 쓰셨다는 작가에, 걸그룹 리더 출신 연예인에, ‘그 쇳물 쓰지 마라’ 챌린지를 주도했던 가수 하림씨까지... “잘못 왔다”는 깨달음이 크게 왔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정신 차려 보니 옆에서 슬레이트를 치고 계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팔자에도 없는 저의 공중파 방송 출연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1일 노동절에 첫 방송되고, 그 후 7주 동안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50분에 방송된 ‘일하는 그대, 리스펙’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혹시 보신 분들 계신지 모르겠네요. 첫 방송에는 당시 한창 투쟁을 하고 계시던 LG 트윈타워 청소 노동자분들이 출연을 하셨고, 그다음에는 화물차 기사님, 수영강사님, 라이더님, 정수기 코디님 등 일명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출연을 하셨습니다. 택배 상하차 알바 경험을 만화책으로 펴낸 작가님과 노동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담는 감독님도 오셨습니다. 경주 외동공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크레인 사고로 떠나보낸 유가족 분도 나오셨고, 노옥희 교육감님과 성공회대 하종강 교수님도 오셨지요.

사실 맨 처음 녹화를 끝내고서는 “두 번은 못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본이 있다”는 PD님 말씀은 사실이었지만, 대본이 있어도 대본대로 안하더군요. 청소노동자 분들이 억울했던 일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하림씨가 “노무사님! 이건 부당한 거 아닙니까? 법적으로 문제 아닙니까?”라고 사자후를 토하시는데, 정말 진땀이 뻘뻘 났습니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법적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데 몇 차례 녹화가 거듭될수록, 이 방송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가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밤 황금시간대에, 그것도 공중파 TV에서 왜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불러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노동조합이 어떤 이유로 투쟁을 하는지 이야기하고,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이야기하고, 왜 학교 현장에서의 노동인권교육이 필요한지 이야기하는, 너무나 신선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지난 토요일이었는데요, 이쯤에서, 제가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방송 출연한 경험을 말씀드리는 이유를 고백해야겠습니다. 울산 MBC ‘일하는 그대 리스펙’은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가 가능합니다. 유튜브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어요. 이 프로그램을 보시고, 입소문을 내주세요. 내년에 시즌2가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이야기가 방송될 수 있도록, 방송 만드신 분들을 응원해주시고, 울산MBC를 칭찬해주세요. “방송을 봤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너무 부끄러워 한없이 오그라들겠지만, 그래도 감수할 테니, ‘일하는 그대 리스펙’ 시즌 2가 나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한 말씀 덧붙이자면,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신 PD님은 울산MBC 노조 지부장 출신입니다. 현대자동차 파업을 앞두고 “위기의 자동차 산업” 류의 특집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전혀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노동’ 어쩌고만 들어가도 편파적이라며 어깃장을 놓는 분들과 대차게 싸우시던 분입니다. 그러니, ‘일하는 그대 리스펙’은 믿고 보셔도 됩니다. 제 말씀을 듣고 ‘일하는 그대 리스펙’을 찾아보시는 분, 제가 ‘리스펙’하는거, 아시지요? ^^

※ 이선이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