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6-01 14:59
[113호] 인권포커스 - 5.18 광주를 다시 새기다
 글쓴이 : 사무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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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를 다시 새기다
- 제19회 울산대학생인권강좌(2018.5.23.) 요약 -

정리 : 김창원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사살당하면서 유신독재는 종말을 고했다. 그 이후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들불처럼 솟아올랐다.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군을 재편하고, 전국적으로 열기를 더해 가는 학생, 노동자, 재야인사 등의 민주화 요구를 물리적으로 탄압하려는 음모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대학생들은 전남 도청 분수대 광장으로 집결하여 시국성토대회를 가졌다. 그 이후 전남대를 비롯한 10개의 대학, 전문대학 등 약 3만 명이 연일 대규모 집회와 횃불 행진으로 시위를 벌였다. 각 대학 교수단과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한 시위는 경찰과의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질서정연하게 민주화를 촉구하는 의사전달식이었다.
오후부터 시작된 ‘민족 민주화 성회’가 저녁 무렵에 끝나면 자연스럽게 횃불을 밝히고 광주시내를 행진했다. ‘횃불 대행진’은 유신독재로 얼룩진 19년간의 암흑을 시민들의 손에 들린 횃불로 기어코 밝히겠다는 의지가 담긴 평화적인 시위였다.
그러나 5월 17일 자정을 기하여 정부는 비상계엄 확대 선포를 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면서 민주인사들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 학살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아침, 등교하려던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대학 정문을 막고 있는 군인들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학생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분노한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해 군인들의 야만적인 폭력행사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점점 많은 시민들이 시내로 모여들었다. 이때 시내 곳곳에 숨어있던 계엄군 병력들이 경찰과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학살 작전이 벌어졌다. ‘충정작전’이었다. 계엄군은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시민들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계엄군에게 붙잡힌 시민들은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바지가 벗겨진 채 속옷 차림으로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이후 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젊은 사람은 시위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무조건 붙잡혀 구타당하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금남로 일원을 장악한 계엄군의 잔혹한 시위 진압은 시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무참히 유린했다.

#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되다

5월 20일 밤이 지나고 21일이 밝아오자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시민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계엄군의 실상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금남로 도청 광장을 향했다. 하지만 도청 광장은 이미 무장한 계엄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러다가 우리 광주의 젊은 자식들이 다 죽는다”며 어른들이 스스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5월 21일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군수산업체인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 트럭과 버스 등을 탈취해 차량시위를 시작했다.

# 희망의 빛으로의 광주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이 나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 손에 책 대신 총을 들었다. 내 손에 들린 총은 누구를 겨누어야 하는가!” 시민들은 도청으로 향했다.
시민군은 도청 광장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서 계엄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차량에 불을 붙여서 계엄군의 바리케이트로 굴리기도 하고, 분노한 시민은 직접 대형버스나 트럭을 몰고 계엄군의 총탄세례를 받으며 돌진하기도 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5월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은 목숨을 건 시민군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긴급하게 철수했다. 계엄군의 학살에서 광주가 해방된 순간이었다.

# 생명공동체 광주

5월 22일부터 광주는 계엄군의 외곽 봉쇄 작전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고 고립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거리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골목마다 몰려나와 시민군에게 먹일 밥을 지었다. 주먹밥을 만들고, 죽을 끓이고, 음료수를 가져오고, 시민군과 시민들은 한 몸이 되어 나누어 먹었다. 외부와 단절?고립되었지만 광주시민 어느 누구도 항쟁 10일 동안 굶은 사람은 없었다.

# 탱크와 총에 짓밟힌 광주

5월 26일. 도청 시민군 본부. 당일 자정을 기해서 계엄군들이 침공해 온다는 정보에 시민군들은 긴장했다. 오늘은 오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까?
5월 26일 자정. 계엄군의 광주 침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시민군 바리게이트가 탱크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계엄군은 새벽 4시쯤에 긴장과 정적에 쌓여 있는 도청 시민군 본부를 포위했다. 그리고 엄청난 총격과 함께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특수부대가 건물로 투입되었다. 시민군이 무장한 낡은 소총은 저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수많은 시민군들이 쓰러졌다.

# 빛으로 잠든 광주
5월 27일. 아침이 밝아오자 계엄당국은 군인과 공무원을 동원해 광주시내에 얼룩진 시민들의 흘린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28일 상무관에 안치되었던 시민들의 시신을 즉시 망월동 광주 시립묘원에 서둘러 매장했다. 이 귀중한 죽음들이 상여도 만가도 흰 꽃도 없이 시립묘원 귀퉁이 땅에 묻히기 시작했다. 아빠가 묻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와 자식이 땅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 실신한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였다. 사망자 155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연행, 구금자 등 총 5,517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침묵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분노가 가득한 침묵이었다. 시민들은 일상을 찾아 다시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학생들은 다시 학교에 등교했다. 계엄군에게 죽임을 당한 친구의 빈 책상 위에는 하얀 꽃만 서럽게 울고 있었다. ‘국가 전복을 노린 불순 배후 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 ‘폭동’으로 규정된 채 광주시민은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10일 동안의 항쟁을 기억했다.

# 마침내, 빛으로 일어서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패배가 아닌 승리의 역사로 되살아났다. 1988년 제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5.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불리게 되었고, 13대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렸다. 공수부대가 저지른 잔혹한 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면서 광주 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의 항쟁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 후 광주 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의 항쟁인 5.18은 ‘민주화 운동’의 대명사로 온 국민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성격

첫째, 5.18 민주화 운동은 1961년 5.16 군사반란을 통해 4.19 민주혁명을 부정하고 억압체제를 구축한 군사정권에 저항해 일어난 사건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중항쟁의 자주, 민주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둘째, 5.18 민주화 운동은 역사의 전면에 민중이 역동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중이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셋째, 5.18 민주화 운동은 인간의 자연권인 저항권의 정당성을, 나아가 저항의 수단으로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받았다.

# 아직 끝나지 않은 진실을 향한 발걸음
5.18 민주화 운동은 아직까지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지휘자, 발포명령자, 미국의 역할, 사망한 양민의 수, 헬기 발포명령 체계 등등.....
역사는 그 진실을 밝혀 잘못을 들춰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교훈으로 후대에 남겨진다.


※ 강의를 해주신 허창영 님께 지면을 통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