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1-30 16:41
[109호] 시선 하나 - 평화기원의 섬 오키나와
 글쓴이 : 사무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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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원의 섬 오키나와

최한석



올해 인권연구소는 인권기본계획 용역을 두 개나 진행했다. 한해를 잘 마무리 하자는 뜻에서 오키나와로 평화인권기행을 떠나자고 의기투합했다. 나에게 오키나와는 대마도와 비슷한 일본의 섬이었다. 다만 미군기지가 있다는 것이 특징이랄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뒤에 찾아간 곳이 이상향 율도국인데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주장에 거는 기대가 더 큰 터였다.
내가 놀란 것은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으며 인종도 일본 본토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때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태평양전쟁에 일본이 패하면서 미국령이 되었다가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키나와에서의 일정은 전쟁의 상흔이 깃든 곳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지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오키나와에 이렇게 많은 전쟁의 상흔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랜터카를 수령하자마자 바로 전쟁의 상흔이 있는 구해군사령부로 이동했다. 구해군사령부는 1945년 3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 5월에 점령될 때까지 약 4000여명의 일본군이 미군에 저항한 전적지이다. 오키나와전투로 인해 20만 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중 오키나와 출신들은 12만 명에 이른다. 일본군은 미군의 본토진격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인들에게 옥쇄를 강요했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 민간인들이 군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일본군에 의한 강요된 죽음을.

‘수치스럽기 전에 죽어라(중략) 부모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젊은이는 늙은이를 에메랄드 빛 바다는 붉은 빛으로 집단 자격이란 손을 빌리지 않은 학살이다’
- 마루키 토시 -

미로와도 같은 땅속 해군기지를 걸으면 인간이 느껴야 했을 극도의 공포를 상상한 후 평화기념공원으로 향했다. 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에서 가장 마지막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마부니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평화기념공원에는 평화기원 자료관과 평화기념당, 전몰자묘역 등이 조성되어 있다. 웅장한 평화기원 자료관 맞은편에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며 설립되었다. 위령탑은 비석과 그 뒤로 거대한 돌무덤이 있는데 비석의 기록에는 1만 여명의 한국인이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되어 무수한 고초를 겪고 혹은 전사도 하고 학살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화공원의 중심에 위치한 평화의 주춧돌에는 당시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곳을 찾았는데 의외의 것을 발견했다. 바로 그 옆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희생자들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1945년이면 분단이 되기 전이었고 조선인으로 희생되었는데 희생자비에는 분단의 상흔이 덧대어져 있었다.

전쟁과 희생과 분단의 역사가 뒤섞이는 감정을 느끼며 평화미술관으로 불리는 사키마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키마 미술관은 관장인 사키마 미치오씨가 조상 땅 반환운동을 벌여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의 땅 일부를 반환받아 그 곳에 지은 미술관이다.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쟁의 참상을 그린 ‘오키나와전의 그림’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높이 4미터, 길이 8.5미터의 대작이다. 이 그림 속에는 집단자결, 바다에 잠기고 있는 사람들, 전장을 헤매는 사람 등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오키나와 전쟁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린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의 슬픈 얼굴도 함께 그려져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자신의 모습에 투영한 것처럼.

오키나와는 전쟁의 참상으로 얼룩진 어두운 곳만은 아니었다. 음식도 먹을 만했고 울산의 추위와는 달리 봄날의 따뜻함도 만끽하면서 다녀왔다. 부탁받은 글이 평화와 인권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글쓴이 때문에 오키나와의 진면목을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혹시 오키나와를 여행하실 분들은 사전에 꼭 공부를 하고 가시기를......^^


※ 최한석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