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0-31 17:07
[106호] 인권포커스 - ‘만나면 좋은 친구’를 그리며...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6,205  

‘만나면 좋은 친구’를 그리며...

이돈욱...


아침, 저녁으로 불기 시작하는 찬바람이 지난겨울을 떠오르게 합니다.
짙은 어둠을 환희 밝힌, 유난히 매섭던 추위를 따스히 감싸 안은 촛불의 밤으로 가득 채워졌던 지난겨울.
대한민국 모든 권력의 주인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역사를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 역시 광장에 섰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 새 시대에 대한 열망, 여기 모인 모두가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그리고 결국 그곳에 이를 수 있다는 달뜬 마음, 그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 함께 하면서도 나누어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청산의 대상이었고, 새 시대로 나아가는 길에 놓인 걸림돌이었으며, 달뜬 마음을 해치는 불청객이었습니다.

광장의 열기를 기록하기 위해 삼산동으로 향했던 어느 날. 자유발언에 나선 한 시민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서울에서는 MBC 카메라가 로고 다 떼고 숨어 다니는데 여기는 당당하게 다니네요.”
그렇지 않다고, 나 역시 여러분들과 같은 시민이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수 있는 새 시대를 바라는 민초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흔을 앞둔 제 기억에도 어렴풋한 ‘땡전 뉴스’를 21세기에 소환한, ‘세월호’의 참담한 상처에 독을 뿌렸으며, 비선실세를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뉴스를 만들어낸 MBC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직에 몸을 담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그들과 함께 하면서 어찌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파업에 나선 이유입니다. 똥을 똥이라고 된장을 된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뉴스를 만들기 위해,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가족들에게 당당하며 시민들의 눈빛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9월 4일부터 언제가 끝일지 알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파업을 시작하자 많은 분들이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관심과 애정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조롱과 조소도 함께 쏟아졌습니다.
‘이미 늦었어.’ ‘그동안 뭐하고 이제야.’ ‘어차피 안 봐.’

참담하고 슬프지만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탓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 스스로가 만든 현실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다만 긴긴 겨울을 지나 봄을 앞둔 이제야 싸움에 나서게 된, 아니 이제야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이번 파업은 저희의 첫 싸움이 아닙니다. 2005년에 입사한 제가 겪은 파업만 네댓 차례에 이를 정도로 잦은 싸움을 벌여 왔습니다. 그 가운데 임금인상이나 처우 개선을 위한 파업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론을 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시도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언론이 언론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아주 기본적인 요구를 위해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반발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파업 카드를 꺼내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희는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언론 장악을 위한 정권의 음모는 치밀하고 집요했으며 거대하고 끈질겼습니다.
반면 한 줌 언론 노동자들의 급여를 내던진 저항은 미약하지 그지없었습니다. 언론 노조 역사상 최장기 파업으로 기록된 2012년 MBC의 170일 파업이 패배로 막을 내리며 길고 긴 암흑기가 시작됐습니다. 해고자 11명을 비롯해 170여명의 동료들이 일터에서 쫓겨났습니다. 동료를 떠나보낸 자리는 정권과 회사의 입맛에 맞는 뉴스를 만들어 줄 사람들과 남은 자들의 무기력으로 채워졌습니다. 다시 한 번 싸움을 벌인 다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쉽게 나서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게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업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단어 뜻 그대로 파업은 일을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에 출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대신 급여 역시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습니다. 언제가 끝이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불안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그 대신 얻을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넉넉해진 시간을 바탕으로 다시 찾은 가정의 화목, 일에 치어 돌아보지 못했던 동료들과의 연대, 신경 쓸 겨를 없었던 건강과 취미생활에 대한 관심 등 그동안 잠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발견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니 저희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출근을 할 이유가 없는 회사에 매일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며 본업보다 더 열심히하고 있는 것. 그것은 다시 돌아갈 우리의 일터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긴 싸움 끝에 우리가 얻어 낼 전리품은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이 아닌, 우리가 써야하는 기사, 우리가 만들어야 할 방송, 그리하여 울산MBC가 지향해야할 지역방송의 가치를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일 겁니다.
많이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반성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권포커스

언론 장악을 위한 부당한 권력이나 자본의 시도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언제고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외부의 힘에 맞서 우리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지역 사회와 연대하고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권력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사랑받던 방송 MBC로, 만나면 좋은 친구에서 다시 만나도 좋은 친구로 꼭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글을 보내주신 이돈욱 님은 울산MBC 기자이며, 노동조합 교섭쟁의 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