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4-27 16:25
[100호] 시선 둘 - 同行二人 - 시코쿠 헨로미치 ②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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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行二人 - 시코쿠 헨로미치 ②

박영철


시코쿠 순례길은 홍법대사가 서기 800년경에 수행했던 길로 시코쿠 88개 사찰을 잇는 총 1,200km에 이르는 장대한 길이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는 물론 옛길을 그대로 보존한 길도 있다. 사찰에서 사찰로 이어진 길이기에 하루 온종일 도로를 걷거나, 해안길 또는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는 길도 부지기수다.
특히 힘든 코스는 터널과 다리인데, 3~4km에 이르는 어두운 터널과 난간이 비좁은 아찔한 다리를 걷다보면 이 길이 내 삶의 마지막길이 안되길 저절로 기원하게 된다. 몇 번이고 잔머리를 동원해가며 터널을 에둘러 가보려고도 했지만 우연인지 숙명인지 걷다보면 어느덧 신기하게도 다시 원점인 터널 앞으로 되돌아가는 어이없음을 경험하곤 했다.

#노숙

순례 6일째, 우리는 어느덧 19번 절을 출발해 21번 절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코스는 일명 죽음의 길로 통하는 <헨로고로가시>. 전날 밤 숙소였던 후나노사토의 주인장은 하루만에 22번 절까지 걷는 것은 도저히 무리이니 21번 절 아래의 폐교에서 노숙을 하는 것이 어떤지 넌지시 물어봤다. 주인장 왈 “어느 정도 바람은 막아줄 수 있으니, 침낭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추위보다는 폐교의 ‘귀신’을 걱정하는 우리에게 일본에는 ‘오니’가 없다며 안심하라고 다짐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21번 절을 오르기 전 슈퍼에서 식량과 추위를 막아줄 약간의 알코올을 구입한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듯 한 경사에 온몸은 출발과 함께 땀범벅이 되었으며, 대나무 숲의 울음소리는 이날따라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산을 오르고 21번 사찰을 참배한 후 ‘이제는 쉴 수 있겠구나’ 기대하며 하산을 했다.
그런데 기대 속에 찾은 폐교는 낯선 순례자에게 숙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교실은 폐쇄되었으며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공간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갑작스런 상황에 우리는 당황했다. 주변에 민가조차 없는 상황에서 다음 헨로휴게소는 험준한 산을 넘어가야하고 그곳 또한 상황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절체절명! 선택의 순간이었다. 밤새 추위에 맞서느냐 아니면 산을 넘어 22번 사찰로 향할 것인가?
확신은 없었지만 이곳에서 머무를 수는 없기에 대책 없이 출발했다. 산은 더욱 가팔랐으며,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체력은 바닥이었으며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이미 어둠이 내린 낯선 곳, 인가도 없고 바람막아줄 그 어떤 곳도 없는 상황에서 마치 기적처럼 ‘와지키 미치노에키’의 불빛을 발견했다. 퇴근하시는 관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 앞 공간에 자리를 폈다. 자리를 잡자마자 때마침 비까지 내리며 겨울밤을 더욱 스산하게 한다. 인적조차 없는 시골의 어느 국도변 휴게소, 그렇게 변변한 침낭조차 없이 겨울노숙을 하게 되었다. 결국 늦은 밤 비바람을 피해 화장실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를 신문지 한 장과 체온만으로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이 또한 순례의 과정이라 굳게 믿으며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 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의 또 다른 매력은 오헨로상(순례자)과의 인연이다. 산티아고 길을 걷고 연이어 시코쿠 순례길을 걷고 있다던 여대생, 이국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낭창낭창 놀멍쉬멍 걷고 있는 호주청년,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미국인 할머니, 국민숙사에서 만났던 캐나다 사람, 자기 키보다 더 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걷고 있던 이름 모를 여성,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던 시바세키상, 트렁크를 끌고 순례를 하고 있어서 트렁크맨으로 불렸던 이토상 그리고 3일간 우리의 통역관이 되어주었던 코쇼보상 등 20여 일 동안 우리를 스쳐갔던 많은 이들이 있었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연락을 하겠다며 헤어질 때의 아쉬움을 남겼지만, 일상으로의 복귀와 함께 약속 또한 사라지고 만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인연이지만,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한 명은 재일동포 3세 안수창씨다. ‘시코쿠를 걷는 여자’에 소개된 젠콘야도 ‘우탄구라’를 찾았다가 우연히 저자와 통화를 하게 되었고, 바로 안수창씨의 가게를 소개받게 되었다. 20여일 만에 맛보는 김치와 특별히 내어준 음식들은 하나하나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재일동포 3세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한국어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게가 우타츠의 한국대사관이라며 이웃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온갖 민원을 받고 있다고 자랑한다. 때론 원망스럽고 때론 자랑스러운 고국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한마디 한마디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부디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이 되어야 할텐데...
24일간의 길지 않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아쉽기만 했다. 무심코 걸었던 그 길들이, 그 숲들이, 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기만 하다. 미처 걷지 못했던 나머지 길들을 언제 가볼 수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떠나는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또다시 뛰기 시작한다. 확실히 역마살이 끼긴 끼였나 보다.

※ 박영철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사무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