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7-04 11:45
[90호] 인권포커스 - 가습기살균제 사태와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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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사태와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

이승진 l 울산시민연대 시민참여팀장

2016년 5월 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시민단체들이 옥시레킷빈키저(옥시)의 영국 본사 임원 8명을 검찰에 고발한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가 뜨겁다. 아이와 아내,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웃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진실 규명과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불매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고 있다. 울산에서도 대형마트 앞 1인 시위와 SNS를 통한 불매운동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옥시는 여전히 형식적인 사과와 기만적인 행동을 통해 조직적 범죄를 은폐하고 있다. 진상을 규명해야 할 정부는 그러거나 말거나 거꾸로 무분별한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하는 기세다. 결국 이 사태는 옥시라는 기업과 대기업의 편의를 고려해 온 산업자원부, 무사안일한 질병관리본부와 환경부의 합작품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옥시는 2001년부터 11년에 걸쳐 453만 개의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했다. 사망자 146명 가운데 103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원료로 쓴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가 원인이다. 옥시는 이 독극물을 사용하면서 최소한의 안전성도 확인하지 않았다. 이는 본사가 있는 유럽에서 ‘바이오사이드 제품의 안전 확인 제조사 책임제도(BPR)’에 의해 규제 받고 있는 독극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 원인을 왜곡하기 위해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연구결과를 조작했고, 전문가들을 매수했으며, 국내 대형 로펌을 고용해서 ‘황사나 꽃가루가 원인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진상 규명을 방해했다.

그렇게 옥시와 관련자들은 정부 역학조사와 동물실험 등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부정하며 5년을 버텼다. 그동안 범죄 공소시효는 소멸됐고, 피해자들은 유명을 달리했으며, 가족들은 비통함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옥시가 배상 책임과 처벌을 교묘히 피해 가고 있을 때 정부는 원인 규명 이외에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이 사태와 관련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해 울산시민연대를 포함한 전국 시민단체들이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국제 서명운동과 영국 정부에 대한 항의도 추진 중이다.

이들 시민단체의 요구는 이렇다. 우선 정부와 국회는 빠른 시일 내에 청문회를 실시해서 진상 규명을 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사태가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옥시 처벌법(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 등)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피해자와 가족들을 보호하는 옥시 피해자 지원법을 제정하고, 공산품안전관리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을 개정해서 옥시예방법을 마련하라는 것이 골자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이러한 조치만이 망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국가의 책임을 다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법계는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불법을 자행한 기업과 청부 연구 학자, 법체계를 흔든 대형 로펌, 이를 방치하고 기업 편에 선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자를 찾아 처벌해야 한다.

또한 연쇄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옥시 제품에 대한 범국민적 불매운동 속에서 매출의 절반 이상이 감소한 대리점 사업자와 직원들, 여기에 모든 생계를 걸고 있는 가족이 그들이다. 울산 지역을 포함한 전국 대리점 사업자들이 밀려드는 반품과 주문 철회, 재고 처리의 삼중고를 겪고 있다. 직원들은 기약 없는 휴가를 내야 했고, 사업자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결국 사망자와 가족들에 이어 납품업체 중소상인들과 직원들이 연쇄적인 피해자로 확산되고 있다. 옥시와 정부, 20대 국회는 자신들의 책임을 자성하고 하루 빨리 시민들의 촉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 글을 보내주신 이승진 회원은 ‘울산시민연대 시민참여팀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