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06 09:43
[82호] 이달의 인권도서
 글쓴이 : 김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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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서경식 / 현암사 / 2015 / 발제 : 김규란

저자 : 서경식
저자 서경식(徐京植)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프랑스문학 전공)를 졸업했다. 현재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공회대학에서 2년간 연구교수로 지내기도 했다. 1971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 유학 중이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이 구속·수감되자 형들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서 활동했다. 이후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라는 경계적 인간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현실, 일본의 우경화, 예술과 정치의 관계, 국민주의의 위험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기고하고 강연했다.


한국어판 서문
시에는 힘이 있을까? 문학에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시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우리를 끝없이 비인간화하는 이 시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시와 문학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항’은 자주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패배로 끝난 저항이 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장소의 ‘저항’을 격려한다. 시에는 힘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이 질문은 시인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져져 있다. 시에 힘을 부여할지 말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p. 4~5

1장 의문형의 희망
세간에 흘러넘치는 언설이나 어조에 대해 시인은 고요한 분노를 토로한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르짖지 마라.” (「목숨의 빛줄기가」)
지금 희망을 상냥하게 노래할 수 없다. 그것은 묵직한 의문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땅끝까지 떠돌 수밖에 없는 그대와 나라면 / 이 갈증은 언제나 채워지는 것일까요?”(너는, 티끌이니」)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꾸며낸 혓바닥”, “거짓된 목소리”를 스스로 금하고, 하다못해 의문을 함께하며 헤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것이 시인이 우리에게 꺼내놓은 의문형의 ‘희망’인 것이다. p. 14

3장 시의 힘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길이 그곳으로 뻗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승산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태도가 아니다. 효율이라든가 유효성이라든가 하는 것과도 무관하다. 이 길을 걸으면 빨리 목적지에 닿을 테니 이 길을 간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의 유무나 유효성, 효율성 같은 원리들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언어이며 그것이 서정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p. 109~110

세상이 달라졌다 /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_______________________p. 152~153

8장 픽션화된 생명
어느 날 강의가 끝난 후 학생의 감상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교수님은 탈원적을 역설하지만, 나처럼 아직 참정권도 없는 놈이 아무리 발언해봤자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일을 생각해봤자 헛일이다.” 이것을 읽고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학생에게가 아니라, 이 사회의 젊은이가 한 개인으로 서기 위한 ‘등뼈’를 이렇게까지 부숴버린 어른들에게 말이다. 헌법 9조의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하고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는 정부를 떠받드는 어른들이, 무슨 수로 아이들에게 ‘생명의 존엄’을 떠들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어른의 위선을 눈치채고 현실을 ‘픽션화’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현실은 픽션이 아니다. 현실의 방사는 오염은 그들을 위협하고, 전쟁이 벌어지면 그들은 자신과 타인을 해쳐야만 한다. 그렇게 되고 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p. 269

산다는 것 / 이시가키 린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 밥을 / 푸성귀를 / 고기를 / 공기를 / 빛을 / 물을 / 부모를 / 형제를 / 스승을 / 돈도 마음도 /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 입을 닦으면 / 주방에 널려 있는 / 당근 꼬리 / 닭 뼈다귀 / 아버지 창자 / 마흔 살 해질녘 /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____________________p. 270~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