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7-24 11:51
[78호] 인권 포커스
 글쓴이 : 김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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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최성호 l 회원

지난 6월 12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울산대학교에서 2015년 한국노동법학회 하계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의 대학 교수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많은 분이 참석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주제는 “산업안전과 근로자의 건강, 보상, 고용”이였는데 그 중에서 임자운 변호사님의 특별보고를 요약, 정리해서 이번 인권포커스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임자운 변호사님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에서 상임활동가 및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발표한 원고를 유지하면서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2014년 8월, 서울고등법원은 삼성반도체 노동자였던 고 황유미, 이숙영의 백혈병은 직업병이 맞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상고 포기로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황상기 님(고 황유미의 아버지)이 딸의 영정을 안고 거리로 나선지 7년 만의 일이다.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 몇몇의 인권활동가들이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고,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각종 발암물질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전문기관의 진단들이 나왔으며, 국내ㆍ외 언론에서도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문제가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2014년 5월, 급기야 삼성전자의 대표이사가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며 보상과 재발방지대책의 수립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SK 하이닉스도 산업보건검증위원회를 출범시키며 반도체 직업병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반올림'에는 직업병 피해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2월 기준 반올림에 제보된 피해자의 수가 삼성반도체, LCD에서만 200여명이다. 질병의 종류도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등 암 질환 뿐 아니라 다발성경화증, 루게릭, 루푸스 등 희귀질환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피해노동자들의 질병이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에 의해 업무와 무관한 개인질병으로 취급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한쪽에 크게 불리한 다툼이나 경쟁을 종종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한다. 반도체, LCD 노동자들의 산재신청과 소송을 대리하다 보면, 이렇게 까지 기울어진 운동장이 또 있을까 싶다. 업무환경을 제대로 평가하고 관련 자료를 제대로 보존, 관리할 책임은 기업이나 국가에게 있을 진데, 평가하지 않고 구비하지 않아서, 심지어 관련 자료를 은폐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불이익은 재해노동자가 지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이하에서는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이 어려운 이유들을 삼성반도체, LCD 노동자 사례를 중심으로 짚고, 최근 법원과 공단에서 있었던 직업병 인정 사례들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먼저,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이 어려운 이유는 작업현장에 대한 자료의 부재, 은폐의 문제가 있다. 작업현장의 변경과 업무환경 관련 자료의 폐기로 재해노동자들은 늘 '과거의' 업무환경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업무환경에 대해서 평가를 받아야 했다. 또한 업무환경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애초부터 구비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기업이나 국가가 재해노동자의 업무환경에 대한 자료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고 재해노동자 측이 그 자료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영업비밀'의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회사가 무분별하게 영업비밀을 주장한다. 둘째, 정부나 법원이 회사의 그러한 주장을 전혀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우도 많다.

다음으로는 최근 법원(서울고등법원 2014.8.21.선고 2011누23995, 서울고등법원 2014.11.7.선고 2011구단8751, 서울고등법원 2014.12.4.선고 2014누55771 판결 등)이 공단에서 있었던 직업병 인정 사례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취지를 구체적으로 설시하며 이를 업무관련성 판단의 기중으로 삼았다. 둘째, 재해근로자들이 업무 중에 노출된 유해요인과 각 유해요인의 노출량을 판단함에 있어 '개연성'과 '추단'의 농리를 적극적으로 끌어왔다. 셋째, '업무환경의 유해성' 및 '상병의 의학적 발병원인'에 대한 입증을 곤란하게 하는 사정들을 업무관련성 판단에 있어 재해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인정하였다.

끝으로 반도체 노동자들의 질병이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첫째, 업무환경 관련 정보에 대한 국가 주도의 보관, 관리 및 공개가 필요하다. 둘째, 근로복지공단이 재해자의 업무환경을 조사할 때 재해자 측의 참여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기타 업무관련성 판단의 절차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셋째, 입증 책임의 전환 또는 분배가 있어야 한다. 최근 반도체, LCD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인정 판결의 내용들을 보면 입증의 정도를 적극적으로 완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입증 곤란의 상황에 대한 규범적인 평가가 분명히 드러나는 판결도 있었다.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해자 입증책임의 원칙이 고수되는 한 한계가 있다. 입증전환까지가 어렵다면 분배라도 이루어져 한다.

더 이상 입증곤란의 불이익이 재해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재해자 입증책임의 원칙이 기업의 산재 은폐에 적극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