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28 16:26
[65호] 여는 글 - 일그러진 자화상
 글쓴이 : 섬균
조회 : 8,516  

일그러진 자화상


최민식 l 공동대표


1. 희생양이 필요한 사회

충격 안타까움 간절함 기도 애도 슬픔 분노 두려움 야유, 애도를 넘어 이 상황에 도취된 듯 집단 광기마저 보이는 듯합니다. 생존자 학부모들은 "이번 사고는 비극 그 자체이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아이들도, 하늘로 간 아이들도, 살아남은 아이들도 모두 우리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라며 "살아남은 아이들이 죄인이 된 심정이다.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보살핌을 위해 정부와 모든 각계각층, 시민사회가 애써 달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참 미안하고 서글픕니다. 무엇을 탓하고 희생양을 찾기에 혈안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인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국가입니다.


2. 무덤이라는 땅 구덩이에 누워


토요일 인턴 이섬균과 밀양 송전탑 115번 농성 움막에서 자고 왔습니다. 10평 남짓한 크기의 움막은 115번 송전탑 자리에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오고 있습니다. 12대째 서씨 집안의 일구어온 전답입니다. 움막에는 쇠사슬들이 묶여 있습니다. 칠팔십 노인들의 저항 줄입니다. 그런데 그 움막 속에는 두 세평 크기의 지하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최후 저항의 자리라고 합니다. 당신들 무덤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누워봤습니다. 1.5m쯤 높이 천정에는 쇠사슬들이 걸려있습니다. 한기가 밀려옵니다.
10년의 싸움, 두 분이 자결하셨고, 한 분은 넉 달이 지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전과 정부는 한 마디 사과조차 없이 공사를 강행하겠다며 다시 칠팔십의 노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국가폭력에 맞서는 어르신들의 손은 굳세고 따뜻했습니다.

3. 신체포기각서를 요구하는 사회 (울산저널에도 기고된 글입니다)

"저는 앞으로 학교생활에 더욱 충실하고 학생신분을 지킬 것은 물론 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굳게 약속하며 학생신분에 어긋난 행위를 하였을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음을 보호자와 함께 다짐하며 이에 서약서를 제출합니다" 낯설지 않은 문구입니다.
학교가 갖는 권위를 이용하여 학생과 그 부모를 순종하게 하겠다는 술수입니다. 학생에게는 부모가 볼모임을 강하게 확인시키고, 학부모에게는 학교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인 샘입니다. 3월 개학에 맞춰 어김없이 들리는 부끄러운 우리 교육이 자화상입니다. 정나미 떨어지는 이 소식을 듣고 베니스상인이 문득 떠오릅니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 바사니오로부터 매력이 넘치는 포오샤에게 구혼하기 위한 여비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바다에 나가있는 배를 담보로 하여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립니다. 그리고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가슴살 1파운드를 제공한다는 각서를 써 주면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세계적 문호 세익스피어의 대표적 희극으로 로맨틱한 줄거리와 감미로운 장면이 풍부한 희극이지만, 당시 유럽사회의 반유대 감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돈을 갚지 못하면 가슴살 1파운드 주겠다는 증서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만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며 그 계약의 맹점을 근거로 고리대금업자 유대인 샤일록을 굴복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법에서는 그 계약은 당연히 무효입니다. 우리 민법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103조)하여 반사회적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량한 풍속'이 무엇인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이 무엇인지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쳐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서약은 ‘맹세하고 약속한다’는 뜻으로 법적행위는 아니지만 양심과 자존감을 다루는 일이므로 법률행위인 계약보다 더 큰 도덕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처벌권을 맘대로 행사하겠다는 학교나 그것을 용인해야 한다는 일부의 생각이 존재하는 사회가 천박해 보이는 데, 내 책임은 매우 크다고 자책합니다. 꽃이 만발한 벚나무그늘에서 체벌을 받던 그 시절이 묘하게 떠오릅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어른, 너무나 창피한 사회, 신뢰를 져버린 국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