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27 09:45
[64호] 여는 글 -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인가
 글쓴이 : 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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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인가


오문완 l 공동대표


웃음을 잃은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울지 못하는 아이는 더욱 불행하다. 왜냐하면 달래줄 어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가이 다카시(永井隆)를 알아야 한다. 나가이 박사는 1908년 시마네 현 출신으로 나가사키 의대 졸업을 앞둔 때까지는 앞길이 구만리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졸업생 환송 파티를 마치고 귀가 길에 비를 맞고 정양을 잘 하지 못한 게 원인이 돼 한쪽 귀를 다치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하던 내과가 아니라 방사선과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이 길의 끝은 백혈병!)
나가이 박사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참전을 해야 했고 의무병으로 1년 동안 히로시마에서 복무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자전적 소설 <영원한 것을>에서는 “군대에서 자유가 허용되는 것은 가슴 속에서 맥박 치는 심장뿐이었다. 그 나머지 숨 쉬는 것, 식사하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변소에 가는 것,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 후 가톨릭을 믿게 되고 가톨릭 신자인 미도리(소설에서는 하노루)와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는 1남 1녀가 생긴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라는 봉사단체에도 가입해서 무의촌 의료 봉사 등 사회활동에도 열성을 보인다.
중일전쟁 때는 군의관으로 4년 동안 중국 각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반전사상을 키운다.(“일선에서 싸우는 청년들은 서로 아무런 증오심도 느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참모본부나 정부는 책상 위에서 전쟁을 하려 하는가? 전쟁을 꾸며 낸 고관들은 안전하게 나라 안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에게 서로를 죽이게 하는 걸까?”)

그나마 태평양 전쟁 때는 중요한 국가 연구 과제를 수행하느라 징집이 되지 않는다. 대신 공습 때 구호반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지나친 일과 연구, 방사선으로 백혈병을 얻게 되고 병약한 가운데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은 1945년 8월 9일이었다. 이미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는데도 일본 정부는 일상적인 공습인 것처럼 보도를 했고, 당연히 아무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고 <영원한 것을>은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은 전황 자체에 대한 보도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여러 차례 밝힌다.
운명의 날의 정황을 소설가 한수산은 이렇게 전해준다(<내가 본 나가이 다카시>).


“흔히 ‘폭탄이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원자폭탄은 떨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폭발한다. 그와 함께 순간적으로 가공할 방사능, 열, 바람을 동반한 파괴가 이어진다. 건물은 그대로 가루가 되고, 사람들은 열 때문에 한순간에 온몸이 타 붙어 버린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500미터 상공에서 작렬한 원자폭탄은, 최대 반경 240미터의 불덩어리였다. 그 중심온도는 100만도, 표면온도가 7,000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양의 표면온도가 6,000도인 것을 생각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 열인가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따르는 방사능, 열선, 폭풍……모든 것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폭심지(원폭 폭발 상공으로부터 직하 지점)로부터 반경 2킬로미터까지 80퍼센트의 건물이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져 내렸다. 말 그대로의 잿더미였다. 그 순간의 사망자가 7만 4,000여 명이었다.
이때 나가이 박사는 나가사키 의대 교수로서 폭심지로부터 700미터 떨어진 부속병원 본관 2층 연구실에서 원폭을 맞았다. 그의 아내 미도리(綠) 여사는 이날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발견된 시신은 죽은 몸이라는 뜻의 시신과 달랐다. 그것은 폭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의 피폭자가 대부분 그랬듯이 이미 희디 흰 뼈일 뿐이었다. 산으로 소개(疏開)되었던 아들 마코토(誠一)가 할머니와 함께 그 뼈를 간추렸다. 잊지 말아라, 이게 네 어머니다. 겨우 10세였던 아들이었지만 할머니가 통곡 속에 들려주던 이 말이 남았다.”
애당초 폭격 대상은 고쿠라(小倉)라는 군수물자 생산기지였다. 그런데 이날 그곳은 날씨가 흐려 공격 목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고 두 번째 목표인 나가사키가 타격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폭탄은 나가사키 시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의 집단 주거지인 우라카미로 날아들었다. 우라카미의 집에 있었던 부인은 목숨을 잃고 병원에 있던 나가이 박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구하게 된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나가이 박사의 동생네가 잠시 박사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이때의 이야기가 <눈물이 마를 날은 언제인가>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박사의 딸 가야노(茅乃)이고, 장면은 사촌 오빠가 엄마가 집에 없다고 어리광부리는 모습이다.

그때 가야노는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울고불고 날뛰는 녀석을 바라보며 “왜 저 모양이야” 하며 웃더니 차츰차츰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린 가슴 속에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리라. 가야노는 제 어미를 찾아 난리를 피우는 사촌에게 부러운 눈길을 던지고 있다. 그 자그만 가슴에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커다란 서글픔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헤어져서, 오늘밤이면 다시 만날 어머니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고 해서 가야노보다 한 살 위인 사촌이 저다지도 울고 있다. 가야노는 그 천 배, 만 배 울고 싶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가야노는 울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고 내 머리맡 가까이에 가만히 앉아 있다. 나는 이때 비로소 가야노가 울지 않는 아이가 된 이유를 알았다.
웃음을 잃은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울지 못하는 아이는 더욱 불행하다. 왜냐하면 달래줄 어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인권이라고 알았다. 그런데 그 전에 울음을 돌려주는 게 더 급한 일인 모양이다.
나가이 박사는 1951년 5월 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기당(如己堂)이라는 두 평 남짓된 집에서 아이들과 살면서 평화를 위한 책을 썼고, 시인 사토 하치로는 ‘나가사키의 종’을 노래했다.



가없이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도리어 슬퍼지는 이 안타까움이여
넘실대는 파도와 같은 인간 세상에
덧없이 피어난 한 송이 들꽃이여
위로하고 달래주는 나가사키의
아아 나가사키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