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7-01 15:53
[198호] 인권포커스 Ⅰ -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재난의 사회성을 읽다」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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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재난의 사회성을 읽다」

# 이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인권교육센터 들’이 연구하여 제작된 <재난 인권교육을 여는 안내서 ‘재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시간’>의 1부.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중 ‘2. 재난의 사회성을 읽다’를 정리한 글입니다.


편집위원회


2-1. 재난을 둘러싼 통념들

어떤 생각이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때로는 잘못된 통념에 붙들려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재난도 마찬가지다. 재난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표적인 통념들은 아래와 같다.

☐ 불가항력?
재난이라고 하면 자연현상으로 빚어지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을 먼저 떠올린다. 재난, 특히 자연 재난에 대해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막을 수 없는 재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재난은 자연현상 혹은 하늘이 내린 불행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재난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만들어내는 일일까.

☐ 갑자기 찾아온 불의의 사고?
재난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뜻밖의,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느닷없이 터지기 때문에 예측도 어렵고 대비하기도 쉽지 않다는 결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과연 모든 재난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일까.

☐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
모든 재난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재난이 발생한 공간의 범위를 특정할 수 있다는 생각도 존재한다. 산불의 경우처럼 발화 시점과 진압이 완료되는 시점, 화마가 휩쓴 공간적 범위가 선명한 재난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재난도 있다. 과연 재난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재난 피해 지역과 피해 공동체를 물리적 공간 중심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 인재(人災)? 안전불감증이 원인?
사고나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인재(人災)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특정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라보는, 현장 대응이나 구조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문제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접근도 흔하다.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안전불감증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몇몇 개개인을 악마화하면서 책임을 묻는 경향도 짙다. 인적 과실을 동반하지 않는 재난은 없지만, 인적 과실 중심의 원인 해석이 가진 해석은 한계가 없을까. 인재(人災)라는 표현은 과연 적절한가.

2-2. 사회적 사건으로 재난을 본다는 것

☐ 자연적 재난이란 없다 : 사회가 만들어낸 취약성에 주목하기

인위적(man-made) 재난과 구분하여 사용되는 자연적(natural) 재난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2022년 여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에서 살던 일가족 세 명이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집안에 갇혀 사망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폭우라는 자연현상이 만든 참사로 보이지만, 침수위험이 큰 비적정 주거에 살도록 방치한 국가의 무책임이 만든 사회적 재난이기도 했다.
폭우로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이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삶터를 잃는 일이 다른 곳에서도 이어졌다. 폭우 그 자체가 아니라 많은 비가 한국 사회의 빈약한 주거정책과 불평등과 만나면서 재난으로 성장했다. 결국 비가 많이 내리거나 땅이 흔들리는 자연현상은 그 자체로 재난이 되지 않고, 폭우, 지진에 대비하지 못한 시스템이 결합해 재난으로 발전한다.
자연재해를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은 지금까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피해의 빈도, 강도, 규모, 양상은 사회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사회의 구조, 그 사회가 만들어냈고 방치한 취약성, 그 취약성에 따라 달리 배분되는 위험 불평등, 부실한 재난관리와 국가의 무책임과 같은 ‘사회적 위험 요인’과 결합하면서 재난의 모양과 회복의 정도가 달라진다.
누가 살고 누가 죽으며 어떤 피해를 양산하는지와 같은 차이도 빚어진다. 결국 자연에 존재하는 위해 요소(hazard)를 사회적 재앙(disaster)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에 축적된 위험 요인’이다.

☐ 사고는 없다 :‘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어쩌지 않은 일’
같은 자연 재난이 ‘자연적’이라는 오해를 주로 받는 것처럼, 선박의 침몰, 화재, 압사와 같은 사고형 재난도 ‘불운의, 불행한, 불의의 사고’라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 이는 누군가의 과실이나 우연적 불운이 겹친 결과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불행한 사고라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을 때 사람들은 천운(天運)으로 살았고 불운(不運)으로 죽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생과 사를 가른 것은 운(運)이 아니라 구조였을 수 있다.

잘 쓰러지는 약
오피오이드라는 진통제를 우연히 바닥에 떨어뜨렸다. 9개월 아기가 마침 그 알약을 먹고 사망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중독예방포장법」이 제정돼 아이는 열 수 없고 성인은 열 수 있는 약병 테스트가 의무화됐다. 이후 비슷한 사고가 큰 폭으로 줄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열 수 없는 약병이 있어도 누군가 알약을 흘리고 줍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알약이 한 칸에 하나씩 들어 있어서 꺼내는 블리스터 포장 방식이 이후 도입됐다.

헷갈리는 레
공군장교 리처드 존스와 공군 심리학자 폴피츠가 1947년에 쓴 「전투기 조종 중에 발생한 460건의 ‘조종사 과실’ 사례의 요인 분석」 논문은 조종사 과실로 결론 난 사고 대부분에서 기체의 제어 장치 설계에 문제가 있음을 밝혀냈다. 레버들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하지만 외형이 비슷하게 생겨 조종사가 헷갈리기 쉽게 설계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고가 난 전투기에는 표준적인 위치나 순서대로 레버들이 놓여 있지 않아 문제를 더 키웠다.

☐ 재난 ‘이후’에 시작되는 재난
재난은 일정한 기간 안에 일어나는 단일 사건이라기보다는 사건 이후에 찾아오는 일련의 사건들까지 복합적으로 누적되는 일련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 재난 이후에 시작되는 재난, 또는 재난 속 재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난의 시간적 범주 확장
흔히 재난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재난으로 인한 피해와 또 다른 재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유가족과 생존자를 비롯한 재난 피해자들이다. 특히 재난으로 가족과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삶 자체와 맺고 있던 사회적 관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이 길게 이어질 위험이 크다. “어쩌면 참사의 본질은 참사 ‘이후’에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세월호 작가기록단의 말은 재난 이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피해도 재난의 한 과정으로서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재난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 확장
1994년 10월 21일 무너진 성수대교는 재건에 들어가 1997년 7월 3일 완공되었다. 다시 이어진 성수대교 북단에는 ‘희생자위령비’가 세워졌지만, 그 이듬해인 8월 18일 바로 그 위령비 앞에서 다리 붕괴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끝내 숨졌다.
재난의 공간적 범주 확장
재난이 덮친 피해 지역을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도 고민이 필요하다. 세월호 피해자들이 사망하고 실종되고 부상당한 참사는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났지만, 그 현장은 이내 이들이 이송된 서거차도와 팽목항과 진도군, 나아가 경기도 안산으로 확대되었다.

☐ 모든 재난은 사회적 사건이다
정리하자면, 재난의 사회성을 읽는다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놓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재난은 자연현상이나 개인의 과실로만 비롯되지 않는다. 모든 재난은 그 사회에 켜켜이 쌓인 위험 요인들과 결합해 일어나는 결과물이다. 재난은 위험이 방치된 곳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며, 사회적 약자들은 재난의 여파를 더 크고 깊게 경험한다.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차별과 존엄의 훼손은 또 다른 재난으로 이어진다. 재난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면 해결의 책임도 사회에 있다. 예방은 바로 그 사회적 위험 요인들과 위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사회구조의 전환을 요구한다.

2-3. 반복되는 재난 참사의 구조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재난이 참사로까지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면 재난의 예방-대비-대응-회복이라는 모든 단계를 재편하여야 한다. 이전에 일어났던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참사로까지 이어진 재난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표적 문제들이 있다. 반복되는 재난 참사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재난의 사회성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인권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재난을 만드는 사회적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일뿐아니라 재난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 의제들에 주목하고 국가의 책무를 명확히 하는 일도 뒤따라야 한다. 재난은 삶의 뿌리와 인권의 토대를 뒤흔드는 중대하고도 위급한 상황이고,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