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길 위에서, 다시 사람을 배우다
- 2025 울산인권평화기행을 다녀오며 -
김윤삼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피 위에 세워져선 안 되지만, 그 피를 지우고는 결코 자라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말해지지 않은 역사 앞에 멈춰 서야 합니다. 기억을 잃은 땅엔 다시 폭력이 자라고, 묻힌 진실은 오래도록 눈을 감은 이들을 부릅니다. 광주는 그런 부름의 땅이었습니다. 2025년 제15회 울산인권평화기행 이틀간의 여정은 단순한 답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품고 걷는 길이었고, ‘기억을 부화시키는 땅’ 위를 맨몸으로 디디는 일이었습니다.
# 1일 차
1. 총탄의 벽, 기억의 창을 마주하다
광주 전일빌딩 245, 그 10층. 햇살은 무심히 창틀을 타고 흘렀지만, 내 시선은 그 벽에 박힌 245개의 총탄 자국에 멈췄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겨눈 국가폭력이었습니다. 그 벽은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총구 앞에 맞섰고, 기억되기를 원한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층 기록관에는 검열된 신문, 왜곡된 방송, 잘린 사진들이 조용한 증언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이의 옆모습을 보며 245개 침묵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기억이 세습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퇴색된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엔 분명히 기억하는 자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2. 오월의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다
금남로를 걷고, 옛 전남도청 앞에 섰습니다. 공사 가림막 너머로, 그 건물은 여전히 꺾이지 않은 채 서 있었습니다. 총성이 울렸던 거리엔 지금 바람도 불지 않았지만, 나는 오월의 울림이 내 안을 조용히 스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피를 흘린 사람들이 누구보다 인간다웠고, 그래서 더 깊이 짓밟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관계’를 맺는 자세로 그 공간을 듣고, 떨고, 겪었습니다.
# 2일 차
3. 묻힌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
망월공원묘지로 향하는 길, 버스 창밖 풍경은 낮은 숨결처럼 조용했습니다. 그 침묵은 무겁고 깊었습니다. 묘비마다 누운 이름들. 열아홉, 스물둘, 그들은 누구의 명령도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했고, 그 이름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윤리적 나침반으로 남아있습니다.
“망월동은 죽은 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산 자들의 책임을 일깨우는 장소”라는 말을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부채이고, 망각은 죄입니다. 우리는 그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4. 그대들의 이름이 빛이 되어
망월공원묘지를 지나, 우리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향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그들은 누운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아래에서 빛처럼 우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짧은 생애가 새겨진 묘비 앞에서, 나는 수많은 책보다 더 깊은 울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어버이이자 딸이었고 아들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민주의 문’ 앞에서 오래도록 참배했습니다. 그 문은 기억과 망각, 침묵과 증언의 경계였고, 너머로 하늘이 흘렀습니다. 그 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5. 바람이 말을 거는 숲에서
죽음의 기억을 품고, 우리는 담양 죽녹원으로 향했습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하루였고, 대숲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습니다. 그 숲길을 걸으며 나는 광주의 총탄 자국들과 묘비들, 그날의 이름들을 천천히 내 안에 내려 앉혔습니다.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그날의 광주는 지금도 우리 삶을 다시 세우고 있었습니다. 죽녹원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고요는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기억하라. 그러나 머무르지 마라. 앞으로 걸어가라. 다만 잊지 말고.”
6.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사람을 배운다
2025 울산인권평화기행 1박 2일. 이 길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본령을 따라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어떤 윤리를 안고 살아가야 할지를 다시 배우는 여정이었습니다. 인권은 거창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주먹밥을 함께 먹는 나눔, 쓰러진 이를 다시 일으키는 손, 불의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 마음, 기억을 지키기 위해 무릎 꿇는 용기.
우리는 이틀 동안, 도시와 거리와 숲에서 그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함께 버스 위를 오르고, 주먹밥을 먹고, 자고, 연대해서 걷고, 같이 울어 주고, 그리고 다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그것이면 충분한 기행이었습니다.
끝으로, 깊은 기획과 정성으로 이 평화기행을 만들어 주신 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님과 사무국장님, 그리고 관계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김윤삼 님은 시인이며, 울산여성의전화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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