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04 17:56
[194호] 시선 하나 -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상관관계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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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상관관계

정일영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현 시국에 대한 뉴스를 볼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하나만 꼽아 보자면 아마 민주주의(民主主義)가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의 위기나 민주주의의 붕괴 등, 온갖 자극적인 수식어와 결부되어 범람하다 보니 이제는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의 피로감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잦은 사용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만은 없을 것이다.
이는 비극적인 현대사를 통해 어렵게 쟁취한 국민으로서의 소중한 권리, 대한민국 헌법이 최초로 제정된 1948년부터 꾸준히 유지되어 온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그 헌법적 선언이 이제 사람들 안에 그만큼 본질적인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다양한 생각을 지닌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善)이자, 우리 사회의 존속에 필수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한 편으로는 정치인들이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민의(民意), 즉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칠 때, 그리고 이러한 목소리를 증폭하기 위해 각각의 지지 세력들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자신들의 구호에 넣고 부르짖을 때, 한 명의 법학자로서 우려가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민주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확인차 짚고 넘어가자.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국가의 통치 과정에서 누구의 의사를 따라야 할지 물어봤을 때,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계급의 의사보다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민중 전체의 의사가 더 우선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만 독립적으로 놓고 봤을 때 그 자체로는 선악을 얘기할 수 없으며 옳고 그름 또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보다 다수의 의견에 더 가치를 두고 통치에 반영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의 결정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점을 알고 있으며 다수가 원하는 바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국가라는 배의 선장은 목소리가 크거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 자가 아니라, 항해술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적으로도 최초의 근대적 민주주의 헌법인 미국 헌법의 제정자들은 당시 ‘과도한 민주주의(excessive democracy)’, 즉 국가의 통치가 다수의 의사에 휘둘려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을 강하게 경계한 바 있으며, 그 결과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통령은 직접선거가 아닌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우위를 점하고 있을 당시, 수많은 전쟁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민 절대다수가 정부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국가라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공동체 구성원인 국민 전체가 함께 논의하고 이에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의 이념이 현재까지는 최선의 정치 형태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통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이념인 법치주의(法治主義)이다.
법치주의, 그 안에서도 민주주의 국가 대다수가 택하고 있는 입헌주의(立憲主義)는 민주주의와 달리 중립적이지 않다. 헌법(憲法)이라는 국가의 최상위 법에 인간의 존엄성을 비롯한 국민의 기본적 권리 및 국가의 통치 구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규정해 놓고, 국가의 모든 권력이 이러한 헌법이라는 가치 규범에 따라 행사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이 두 개념의 상호관계를 학습해 온 바 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반장 선거에서 투표라는 개념을 접하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대표를 뽑는다. 동시에 우리는 선거 자체에도 하나의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안에서 후보를 선출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고, 선거에서 당선된 학급의 대표라고 하더라도 학교의 교칙을 마음대로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치 또한 동일하다. 우리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직접 선출하여 그들에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통치 권한을 위임하지만, 그것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법 위에 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입법부나 행정부가 여론을 등에 업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거나 헌법으로 주어진 범위 이상으로 권한을 행사하고자 할 때, 아홉 명의 비선출직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가 제동을 걸 수 있는 정당성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민주주의는 현대 시민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일지언정 유일한 가치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보완적이자 상호 견제의 관계이다. 외바퀴 자전거도 굴러는 가지만 훨씬 불안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주를 견제할 수단이 없으며, 민주주의 없는 법치주의는 민주적 정당성을 무시한 채 형식적 절차에 스스로를 가둘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최근의 국내 정치 지형에서 민주주의라는 대의명분 아래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주장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은 분명 경계할 부분이다. 여론 조사의 결과에 따라 위법이 합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지지율의 변동에 따라 헌정 질서의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적 목소리를 높일 권리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경계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현대 시민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 원칙의 파괴를 의미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정일영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