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05 23:49
[190호] 시선 셋 - 외솔기념관과 병영성 일대를 함께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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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사무국
조회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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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기념관과 병영성 일대를 함께 걷다.
김준형
10월 중순, 그런데도 여전히 낮에는 이번 여름 우리를 유난히도 괴롭히던 무더위의 잔열이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던 날, 저와 아버지는 울산인권운동연대에서 병영성 일대를 둘러보는 ‘동행’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한창 가을임에도 살벌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을 피하라는 듯 자신의 우거진 나뭇가지를 드리워준 커다랗고 오래된 곰솔 아래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13명. 10시쯤에 이번 탐방의 첫 번째 목적지인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은 이전에는 장대벌이라 불렸던 곳인데, 병영에 모인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장소이면서 동시에 죄인들의 처형을 집행하기도 했던 곳이라 합니다. 성당 앞 잔디밭에는 이곳에서 순교하신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류 루카, 3분의 복자(福者)를 추모하는 석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입구부터 예수님의 고난이 간략하게 새겨진 그림들이 방문자들을 성당까지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종교의 자유라는 권리, 하지만 여전히 해외의 몇몇 나라에서는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새겨보며, 박해받았음에도 의연하게 떨치고 일어나 맞서 싸운 순교자분들의 생애를 생각하며 참배를 드리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장소는 산전샘과 어련당이었습니다. 어련당은 동천의 옛날 명칭인 어련천에서 따온 이름으로, 아름다운 말이 흐르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멋들어진 한옥 형태의 숙박시설로, 과거 조선의 6조의 첫 음들을 따와, 이(怡), 호(好), 예(睿), 병(幷), 형(馨), 공(恭), 총 6개의 방과 중심의 어련재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산전샘은 기록상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샘터로써 널리 알려질 만큼 그 물맛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병영성 동문을 넘어 도착하게 된 다음 목적지는 외솔기념관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시고, 광복 이후 국어의 기틀을 세우신 분으로 알려진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행적과 그 의의를 전달하는 훌륭한 장소였습니다. 최현배 선생님의 친필 원고나 직접 편찬하신 교과서와 사전들 역시 사료로써 직접 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 뒤쪽에는 외솔 선생님의 생가를 복원한 터와 사후 제자들과 친우들이 세운 묘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저 특정 언어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업을 잃고 모진 옥살이를 견뎌야 했던, 그럼에도 목숨을 바쳐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 글을 지켜내고 발전시킨 분들의 공로를 생각하면 깊은 존경심이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외솔기념관을 뒤로하고 다시 돌아 병영성 둘레길로 오르자마자 보이는 탁 트인 풍경과 부분만 얼핏 보아도 상당한 규모임을 짐작하게 하는 성 외곽의 모습은 그동안 걸으며 쌓인 피로도 잊게
만드는 시원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경상좌도의 모든 군인들이 이곳에 모여 병마절도사의 지휘 아래에 이 성벽 위에 섰을 것을 상상하니 괜스레 마음 한편이 뜨거워집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을 흐르면서 크게 훼손됐지만, 복원사업의 결과가 개인적으로는 꽤 그럴듯하게 이뤄진 것 같았습니다. 일정 간격마다 설치된 치성(雉城)과 성벽 아래에 있던 마른 해자까지도 세심하게 재구성하려는 모습이 볼 수 있어서 상당히 즐거웠습니다. 굳이 역사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아도 성곽 위를 걸으며 울산 시내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여전히 한창 복원공사가 이뤄지고 있던 서문지에서 내려와, 병영성 내 옛 우물터에 잠깐 들린 뒤, 도착한 다섯 번째 행선지는 병영초등학교였습니다. 병영초등학교 자체도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이나, 그 이전에는 동헌을 비롯한 수많은 관아시설이 위치한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학교를 둘러싼 담장과 건물들로 인해 온전히 보기 힘들지만, 한눈에 울산 시내를 모두 아울러 바라볼 수 있던 공간임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학교의 높은 담장을 따라 내려가면 학교의 지난 시절들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있고, 그 끝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관아로 들어가는 정문인 진해루와 함께 있었던 이 비석에는 토포사이하개하마(討捕使以下皆下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병마절도사가 겸직하던 관직인 토포사 밑의 관직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입니다. 종2품의 고위 관직인 병마절도사의 권위를 한 문장으로 위엄 넘치게 나타내는 유물입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다다른 곳은 이번 기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삼일사(三一祠)입니다. 삼일사는 그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병영에서 일어났던 삼일운동 도중에 순국하시거나 투옥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봉안한 사당입니다. 서울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삼일운동에 감화된 울산 출신 유학생들이 귀향하여 청년회 간부들과 함께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이루어졌던 만세운동은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수비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당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다치고 그 자리에서 4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돌아가신 4분은 사진조차 찾을 수 없어 사당에 전시된 영정에는 무궁화꽃이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비폭력시위 운동으로 대통령마저 탄핵할 수 있던 우리와 그저 단체로 모여서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구금, 심지어 살해까지 당한 그 시절의 조상님들 사이의 가슴 아픈 대비를 마음속에 새기며 목례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랜만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동행에 나서면서 여전히 울산에 제가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평소에는 상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움직였지만, 이런 기회를 계기로 제 고향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역사적인 의의를 찾아 돌아다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새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말에 저의 손을 끌고 나와 주신 저의 아버지와 친절하게 맞이해주신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 김준형 님은 2차 동행에 함께한 회원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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