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05 23:45
[190호] 이달의 인권도서 -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 / 박이대승 저 / 오봄 문고 2020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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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
박이대승 저 / 오봄 문고 2020 / 정리 : 배미란

# 들어가며
7~8면.

임신 중단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한국 형법은 임신 중단을 범죄로 규정해왔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들의 오랜 싸움은 민주화 이후 30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곧바로 시민들의 일반적 합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국회는 헌법재판소의 요구에 따라 기존의 낙태죄 조항을 대체할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입법 과정은 임신 중단에 관한 치열한 정치적 논쟁을 요구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논쟁의 장이 합리적 규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9~10면.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임신 중단에 대한 한쪽의 견해를 지지하고, 반대쪽을 반박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의 사회 갈등이 자주 그렇듯, 임신 중단에 관한 논쟁에서도 비합리적 찬성 입장과 비합리적 반대 입장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태아의 생명권 개념이다. 한쪽에서는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를 동시에 인정하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태아의 생명권을 정치 언어로만 활용할 뿐, 태아의 법적 지위와 생명권 개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는다.

11면.
낙태죄 폐지는 단지 임신 중단의 비범죄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여성이 자기결정권에 기초해 임신 유지와 중단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임신 중단을 권리의 문제로 규정한 것이다. 즉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며, 국가는 임신 중단을 단지 허가하는 게 아니라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가 다루어지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12면.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장부터 4장까지는 미국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표준 논변으로 삼아 2019년 한국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헌법불합치 의견이 전제한 태아의 생명권이 어떤 모순을 만들어내는지에 집중한다. 5장부터 7장은 다소 철학적인 주제를 다룬다.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존재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8장 이후에는 앞부분의 논의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쟁점을 검토한다. 특히 생명과 생명권의 구별, 자기결정권 개념이 중요하다. 그리고 표준 논변이 마주하게 될 반론들을 검토하면서, 합리적이라 인정할 수 있는 입장들을 가려낸다.

# 마치며 : 가능한 입장들
120면 이하.

이 책의 목적은 임신 중단에 관한 다양한 입장 중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구별하고, 합리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 논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첫째, 분명한 정의를 제공할 수 있는 개념만 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명과 생명권을 혼동하면 안 된다. 둘째, 모든 주장은 논리적 일관성과 정합성을 갖춰야 한다.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라고 주장하려면 태아가 법적 인간인지, 예외적 임신 중단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논해야 한다. 셋째, 사실상의 차원과 권리상의 차원을 구별해야 한다. 임신 중단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임신 중단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사실상의 문제가 아니다. 낙태죄 위헌 결정 이전에도 임신 중단을 할 수는 있었다. 임신 중단을 권리상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임신 중단이 합법화되더라도 여성의 권리로 보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임신 중단에 대한 여러 입장 가운데, 위 규칙들을 준수하는 것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태아가 생명권을 가진 법적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어떤 임신 중단도 허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태아에 관련한 모든 법률을 수정해서 현행 법체계를 재구성해야만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임신 중단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법적 범주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다.
②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표준 논변이다. 임신 중단을 비범죄화한 국가 상당수가 선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를 여성의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태아 생명의 보호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임신 중단 허용 기간을 제한한다.
③ 태아의 생명 보호는 임신 중단 기간 제한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표준 논변은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동체의 이익이 시간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전제하는데,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세 번째 입장에 이르게 된다.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하는 경우는 많지만, 첫 번째 입장에 해당하는 것은 거의 없다. 두 번째 입장을 대표하는 사례는 단순 위헌 의견, 헌법불합치 의견도 여기에 가깝지만,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입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 세 번째 입장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경우는 발견하기 힘들다.
두 번째 입장이 임신 중단 대체 입법의 원리로 채택된다면 이는 논쟁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논쟁의 시작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