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2-29 01:27
[180호] 이달의 인권도서 - 재수사1.2 /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2022)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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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 1.2
- 공허와 불안의 한복판을 타격하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서사! -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2022) / 정리 : 오문완



2023년을 마무리하는 책입니다.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형사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은 피가 흐르는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연지혜 형사는 2000년 8월에 벌어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재수사를 맡게 된다. 신촌 뤼미에르 빌딩 1305호에서 벌어진 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당시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 민소림으로, 과도로 추정되는 흉기에 찔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민소림의 원룸에는 에어컨이 켜져 있었고 시신은 우비와 이불로 덮여 있었다. 뤼미에르 빌딩 엘리베이터 CCTV는 짝수 층은 망가져 있었고 홀수 층의 CCTV만 가동되고 있었는데, 8월 3일 0시경 13층에서 내려가는 남자의 이미지가 하나 남아 있었지만 모자를 깊게 눌러써 턱 부분의 윤곽만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민소림의 몸에서는 신원미상의 DNA가 발견되었으나 당시에는 매치되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의 기록을 더듬어가던 연지혜는 당시의 수사 기록에서 누락 된 부분을 발견한다. 민소림과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는 연세대학교 남학생을 소환한 기록은 남아 있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었던 것이다. 그 기록을 살핀 정철희(팀장)는 과거에 자신이 수사 중 그 학생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며 그를 기억해낸다. 이름 이기언. 22년이 지난 지금은 IT 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는 이기언을 찾아간 연지혜와 정철희는 2000년 당시 민소림과 이기언이 미등록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지혜는 이기언의 소개로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의 멤버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 영화감독이 된 구현승, 목수인 주믿음,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김상은. 셋은 종종 주믿음의 공방에서 만난다고 했다. 취재가 이어지던 어느 날, 주믿음은 민소림의 죽기 전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데…….

누가 범인인지는 알려드릴 수 없고요(아니고, 금방 알려드릴게요), 인권의 시각으로 소설을 읽자고 치고 몇 장면만 소개합니다.

우선, 주인공 연지혜의 캐릭터입니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강력범죄수사1계 강력1팀 1반 소속 형사인 연지혜 경사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블랙진에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재킷 차림이었는데 피부도 가무잡잡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고민 없이 인터넷 쇼핑으로 산 최저가 제품들이었다.
연지혜는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자신이 미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접었다. 그럼에도 가끔 길거리나 술자리에서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는 있었다. 기본적으로 체형이 좋은 데다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는 덕에 군살이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긴장감이 흘렀기 때문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얼굴선이 조금 이국적이어서, 학창 시절 내내 별명이 동남아, 말레이, 태국 등이었다. 그런 별명이 인종차별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재수사》 1권, 13쪽)
“고작 300만 원 훔친 놈인데 붙잡은 사람이 젊고 예쁜 여자 형사라니까 TV에 나오잖아. 뭐, 그런 거야.”
‘젊고 예쁜’이라는 말이 거슬렀지만 그런 데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경찰 생활 못 한다. 지구대에서 근무할 때에는 취객들로부터 온갖 성적인 욕설과 외모 비하 발언을 들었다. 연지혜는 “그렇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재수사》 1권, 19쪽)

다음은 참고인으로 만난 도스토옙스키 독서 모임의 멤버 김상은의 캐릭터입니다.

연지혜는 인사를 하다 말고 멈췄다. 김상은의 얼굴에 크고 검은 반점이 있는 걸 보고 놀라서였다. 햇빛 아래에서 걸어올 때는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화장으로도 도저히 가릴 수 없을 진한 반점이 김상은의 양 눈썹 사이에서부터 콧등을 타고 내려와 오른쪽 뺨 가운데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먹물을 뿌린 듯했다.
연지혜는 상대의 점을 보고 멈칫한 것이 실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김상은 역시 연지혜가 자신의 점을 보고 놀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재수사》 1권, 349-350쪽)
“…저와 민소림은 아주 특별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요. 저희 모두 외모가 다른 사람 눈길을 끌었죠.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이 저를 쳐다봐요. 그건 참 익숙해지지 않아요. 소림이도 그랬을 거고요.”
김상은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연지혜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만 살짝 숙였다.
“괜찮아요. 편하게 대하셔도. 일본의 오타라는 박사 이름을 따서 오타 모반(母斑)이라고 해요. 원인은 모른대요. 선천성도 있고 후천성도 있는데 저는 선천성이죠. 점이 얼굴에 좌우대칭으로 나면 후천성, 한쪽에만 있으면 선천성이라고 보시면 돼요. 후천성이 치료가 비교적 쉬워요. 저는 아주, 아주, 치료가 안 되는 편이고요. 수술도 여러 번 했는데 이래요. 이번 생은 그냥 포기했어요. 참 우습죠. 조물주 입장에서 보면 이게 대단한 실수는 아니거든요. 먹고 자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 그것도 나이 어린 여자아이한테는 심각한 사안이에요. 어릴 때에는 성격도 많이 어두웠죠. 콤플렉스도 심했고. 그런데 이제는 극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거기에는 소림이의 죽음도 큰 영향을 미쳤죠.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듯했던 아이가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적어도 나는 소림이보다는 처지가 낫지 않나, 건강하게 살아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생각, 나쁜 걸까요?”
“아니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지혜가 대답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쓴 글이 기억났다. 동료가 가스실로 끌려갈 때 ‘나는 이번에도 아니다’라며 환희를 느꼈다는.(《재수사》 1권, 355-356쪽)

이 오타 모반, 소위 점박이가 문제인데 ‘점박이’를 달리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피해자의 사촌동생 하은수가 그러합니다.

“그때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맞히면 소림이 누나가 저를 ‘점박이’라고 부르면서 기뻐했는데, 저는 그게 그렇게 설랬어요. ‘와, 점박이 대단한데? 오, 점박이 한 건 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소년 한은수는 점박이라는 표현도 좋아했다. 민소림이 가볍고 유쾌하게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좋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그를 ‘눈탱이’ 혹은 ‘눈탱이 새끼’라고 불렀다.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움찔 놀라는 표정이나 말없이 외면하는 시선, 혹은 호기심에 차서 관찰하려는 눈빛이 훨씬 거 견디기 어려웠다.(《재수사》 2권, 127쪽)

자, 이제 결말입니다.

민소림은 족집게를 가져와 내 귀에서 면봉을 뽑았다.
자, 내가 네 골칫거리를 해결해줬으니 너도 내 골칫거리를 해결해줘. 저기 설거지 좀 해주고 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녀처럼 그 지시에 따랐다.
나는 얼굴에 퍼런 점이 있는 부엌데기였다. 친구 집에서는 먹고 자는 식모였고, 민소림의 집에서는 출장 온 파출부였다.
잠깐 동안 나는 민소림이 내 친구가 되려고, 일부러 그렇게 무례하게 나를 대하는 거라고 오해했다. 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 와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소림은 내 손에서 수세미를 뺐으며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점박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나를 무시하는 사람도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내뱉은 적은 없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 그날 받은 상처 부위가 사실-상상 복합체의 핵심에 해당하는 영역임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얼어붙어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뭐?
점박이. 그 민소림이 다시 말했다.
나는 칼을 집어 들었고, 그녀와 격투를 벌였다.
그렇게 나는 콤플렉스가 심한 오타 모반 환자에서 기과한 철학을 지닌 살인자가 되었다.(《재수사》 2권, 351-352쪽)

그래서?
말조심 또는 입조심 + 눈 조심
(연말이니 퀴즈 하나:
눈동자가 돌아가는 유일한 동물은?
사람
왜 눈동자가 돌아가죠?
관심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