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29 09:14
[179호] 이달의 인권도서 - 어떤 호소의 말들 / 최은숙 지음 / 창비(2022)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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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
최은숙 지음 / 창비(2022) / 정리 : 김창원


“그동안 추천사에 써본 적 없는 단어이지만 이 책에만큼은 감히 ‘필독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김혼비 작가의 추천의 글 말미에 쓰인 문장이다. 대체 어떤 글 이길래 ‘감히(두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라는 부사어를 달고 ‘필독서’라는 말을 덧붙였을까?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억울함을 부여잡고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를 찾고, 인권위 조사관인 작가는 그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여러 감정이 다양한 사연만큼 작가에게도 깃든다. 작가는 그 속에서 새겨지는 다양한 무늬들을 글 속에 녹여냈다.

인권위 조사관으로 일하며 만났던 다양한 무늬의 사연을, 그 안에서 때론 기가 막혔고, 때론 안타까웠고,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기로 했다. 법률과 제도로 규정되는 인권이 아니라 조금 슬프고, 이상하고, 귀엽기도 한 모순된 존재인 우리의 모습 안에서 인권을 말하고 싶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웅크린 말들’에 작은 스피커 하나 연결해 세상에 조용히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다. - ‘프롤로그’ 중

30개의 소주제 속에서 만나는 진정인들은 나와 내가 마주하고 이웃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연 역시 내가 겪는 일상 속에서 접하게 되는 사건들과 겹쳐진다. 진정인의 억울함이 나의 억울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작가의 갈등과 고민이 나의 고민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면서 생기는 연민, 분노, 애증, 안타까움과 막막함, 두려움과 불안 등 사연 사연마다 다양한 감정들이 드나든다. 작가는 자신을 또는 진정인을, 사람을 크고 위대하고, 당당한 존재가 아닌 ‘조금 슬프고 귀여운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서로 보듬고 기대며 가야 할 존재로 보는 듯하다. “선의와 열정을 담은 마음이 모여 진실의 불을 밝힌다는 믿음의 경험치”(‘프놈펜 가는 길’ 중)를 이야기하며 ‘인권’의 이름으로 희망을 피워내고자 한다.

“새빨간 거짓말 속에 어떤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C도 가끔은 현재의 ‘밑바닥 인생’과는 다른, 괜찮은 인생을 살아보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 C는 내게 자신이 꿈꾸던 다른 인생 속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그 남자의 새빨간 거짓말’ 중

“매일같이 파출소 근처를 서성이고, 자기만의 논리로 이상한 진정서를 써서 여러 기관에 제출하는, 소모적이고 무용해 보이기만 한 행위가 알고 보니 A의 몸부림이고 외침이었다. 약자에게 더욱 엄격하고 불리한 법과 제도를 향한, 낡은 양복 한 벌 가진 이의 인정투쟁이었던 것이다.” - ‘누군가의 제일 좋은 옷’ 중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자기방어에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문자 밖의 사람은 문자로 된 법의 세계에서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노인의 화려한(?) 전력의 일부는 혹시 글을 몰라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 - ‘수인의 하얀 손’ 중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노래한 시인의 말처럼 모든 진정 사건들이 그랬다. 자세히 보아야 인권위까지 찾아온 마음이 보였다. (…) 어떻게든 버티며 존엄을 지켜가는 이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은 칼이 아니라 한마디 말이나 태도일 수 있다. (…) 차별과 편견은 어떤 존재를 한순간에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꼭 어떤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진공청소기나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각 없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 - ‘굴비장수 주제에’ 중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박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 대단한 위로와 희망만은 아닐 테니까. (…) 나의 친애하는 진정인들뿐 아니라 비슷한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말로 안부를 전하고 싶다. “당신, 괜찮으세요?” - ‘수취인 사망’ 중

작아서 더 아픈 사연들은 여전히 순전한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연들이 글로, 영화로, 그림으로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위로하는 일에 인권위 조사관으로서 벽돌 한 장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청와대 앞을 쌩쌩’ 중

이 책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간절한 이들의 사연과 지푸라기라도 손에 쥐여주려는 인권위 조사관의 사연을 겹치며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각도에서 인권의 무늬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인권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감히 이 책을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