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4-30 12:19
[172호] 지역인권동향: 제주 - 혐오 표현은 누려야 할 자유·권리 아닌 ‘사회의 독’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1,088  
혐오 표현은 누려야 할 자유·권리 아닌 ‘사회의 독’
- 보편적 가치 안에서 표현의 자유 온전히 누릴 수 있어 -

신강협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집단이든 간에 어떠한 일이든 반드시 토론과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 시민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부분과 일치하지 않고 또 어느 부분은 자신의 자유로운 욕구와 맞지도 않으며, 어떤 부분은 불만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타인을 비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타인을 배려하고 모두가 좋고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데 동참하고자 하기에, 대략의 큰 공감의 영역에서 동의를 표하고 합의를 이뤄나간다.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세상이 자기 자신에게도 좋은 세상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공동선’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면서 모두에게 더욱더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오늘 필자는 이 민주주의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빙자한 ‘혐오 표현의 해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2023년은 4.3 75주년이다. 올해 4.3 추념식은 난데없이 등장한 자칭 ‘서북청년단’이라는 혐오세력의 등장과 극우적 정치세력의 발언으로 4.3의 역사적 정의가 흔들리고 혼란이 빚어졌다. 자칭 ‘서청’이라는 그들의 신념에 있어서 제주 사람들의 희생은 그저 자신들의 애국적 행위에 따른 부수적인 피해일 뿐이라고 한다.
빨갱이라는 혐오에 찌든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정의롭다는 확증편향을 신봉한다. 4.3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된 사건이 아니라 이념 대결의 장이며, 자신들의 이념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주도민에 대한 차별은 그러한 혐오에 기반해 여전히 존재함이 드러났다.

그리고 어제 4.16 세월호 참사 9주기 기억식이 열렸다. 그러나 특별히 올해는 9주기를 맞아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고 위로하기는커녕, 4.16을 사회의 한 장면에서 삭제하려는 노력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그간 세월호 참사에 대한 혐오적 발언과 차별로 인해 온전하게 진실을 다 규명하고 있지 못하며, 재난의 역사를 제대로 사회의 교훈으로 삼고 있지 못한다. 필자는 그 결과로 우리 사회가 또다시 ‘이태원 참사’라는 비극을 맞이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필자는 9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생중계되던 TV 화면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라’는 기득권 세력과 정치세력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직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 속 희생된 이들의 영상을 보지 못한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지금도.
그런데 지금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해 일부 세력들은 여전히 막말을 해대고 있다.
이제 그만해라’, ‘이제 그만 잊으라.’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다. 그러자 또 다시 사회의 일부 극우 세력들은 떠들어대고 있다.
‘기억 하지마라’, ‘그냥 가만히 있으라.’

그간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 끈질기게 표출되는 혐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의와 공동선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그리하여 제주는 4.3을 기억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노력을 지금도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다.
또한 우리는 4.16 기억식을 사회적 합의로 열고, 전국의 교육청에서는 4.16 관련 추모행사들을 진행해왔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회적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노력을 확대해왔다.
그런데 근래 ‘자유’를 극단적으로 주창하는 정권으로 인해 ‘혐오의식’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거리낌 없이 표출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적 정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공감대보다도 설령 불의하더라도 개인의 자유가 더 우선시 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개별적 사람들의 개인적 신념에 사로잡힌 자유가 더 보장되는 듯하다. 더 나아가 적반하장격으로 그러한 그런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막는 것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되레 역정을 내고 있다. 그렇게 혐오 표현들은 역사적 정의를 부정하고 사회적 퇴행을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혐오는 ‘표현의 자유’의 대상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 가치 안에서만 자유롭게 보장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욕구가 모든 것에 앞서서 최우선시되는 자유는 아주 좁은 의미의 자유이며, 오히려 방종이 될 수 있다. ‘공동선’이라는 가치를 파괴하고 왜곡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계가 있는 개개인들의 정보와 학습력, 상상력을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을 통해, 보다 더 큰 의미로 상승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토론의 장점이다.
하지만 반민주적이고 상대에 대해 혐오적이며 개인의 신념으로만 가득한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공론의 장을 개별적 인간들의 자기주장 아귀다툼으로 변질시켜버린다. ‘공동선과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사라지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개별적 신념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개인의 개별적 신념은 설득할 수도 없으며, 설득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개개인들의 신앙의식은 토론의 주제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구성원 모두가 다 자기주장만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혐오표현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명료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혐오표현이라는 것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반대하며 저항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문 29조에서 모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공동체 안에서만 온전히 충족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인권이라는 가치가 개인의 욕구에 기반한 권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공동체 전체를 통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충족될 수 있는 권리라는 이야기이다. 그 보편적 가치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최종적으로 세계인권선언문 30조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권리’란 없다고 못 박는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뿐만 아니라 그리고 사회적 재난으로서 목숨을 잃으신 모든 분을 추모하며 명복을 빈다.

※ 신강협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이며,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