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2-28 18:08
[170호] 이달의 인권도서 -『 여자전 』김서령 저 / 푸른역사 2007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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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전

-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

김서령 저 / 푸른역사 2007 / 정리 : 김영해


p. 5-9 소녀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 작가의 말


(…) 이 책≪여자전≫은 한국현대사를 맨 몸으로 헤쳐온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 살아온 사연을 다 풀어놓으면 책 열권도 모자란다”고 흔히 말하는, 역사 속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묶어보고 싶었다. (…)
이만큼 살아놓고 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남의 이야기를 쉼 없이 찾아다녔다는 걸 알겠다. 그중에서도 한국현대사를 아프게 헤쳐나온 여자들의 이야기 앞에서 전율했다.

≪여자전≫엔 모두 일곱 여성이 등장한다. 동상으로 발가락이 빠져버린 지리산 빨치산 하나, 팔로군이 되어 마오쪄둥의 대장정에 참여했다가 나중엔 중공군의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여자 군인 하나, 만주에서 일본군의 성노예생활을 하느라 자궁까지 적출당한 위안부 하나, 월북한 좌익 남편을 기다리며 수절한 안동 종부 하나,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창문 너머 춤을 배웠던 춤꾼 하나, 전쟁을 참혹하게 겪지는 않았으나 일상 속에서 남성과의 전쟁을 누구 못지 않게 가혹하게 치른 미술관 주인 하나.

(…)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젠더로 태어났다는 것이야말로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는 걸. 식민지와 전쟁, 좌우 대립과 가난, 독재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그들은 실체도 모른 채 온몸으로 헤쳐왔다.(…) 어쩔 수 없이 이분들은 공동체운명체였다. 개인사는 결국 국가 역사에 지배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이번에 새롭게 실감했다.

삶의 선배들이 겪어온 이야기는 우리를 내성케하고 인생의 비밀스런 뜻을 체득하게 만든다. 동시대를 공유한 우리에게 뻐근한 연대감을 주고 고립된 각자를 소통하게 만든다. 그게 지혜롭든 어리석든 대담하든 비겁하든 한스럽든 찬란하든 구체적인 삶의 경험은 우리들 살아가는 길의 눈을 틔워준다.

이 책에 나오는 일곱 분은 개인사의 곡절을 뚫고 나오면서 제 삶의 진액으로 역사를 써오신 분들이다. 그러느라 심신이 갈라지고 부스러지고 뒤틀렸지만 결국 야물게 제 상처를 아물리신 분들이다.
한 세상을 아프게 견뎌낸 자의 삶엔 목리 같은 지문이 생겨난다. 소녀였던 그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셨고 쓸쓸하나 의연하게 세상을 멀찍이 내다보며 미소하신다. 이 어른들의 삶은 날 숱하게 울렸다. 그러나 그 울음 안에서 나는 전 세대의 설움과 내 설움이 한데 얽히면서 희뿌옇게 풀려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 잔인한 역사, 가혹한 인습과 가난에 시달렸지만 이들 가슴의 뜨거움은 아직 식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단련되었으므로 더 뜨겁게 이 땅과 사람들을 껴안고 싶어하신다.

세월이 쏘아놓은 화살들이 빠르다고? 그건 하릴없는 이들의 비유일 뿐이다. 이분들의 삶은 유장하고 장엄하다. 허망하지도 남루하지도 않다. 이분들의 희생과 정성을 닻줄 삼아 우리 현대사는 격심한 변동과 갈등 속에서도 난파하지도 좌초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거기 꽃 피고 새 울고 천둥 치고 바람 부니 머지않아 열매 맺을 것이다.

p. 48-49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개인

한 사람의 인생의 무게는, 곡절 속을 헤쳐 나온 개인의 경험은, 그 나라 역사에 깊이와 부피를 덧얹는다. 개인사의 총합이 곧 역사일 순 없겠지만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쟁이나 혁명이나 왕조의 흥망이 아니라 개인사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존엄하고 아프고 우리 앞에서 저렇게 야문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다.

p. 152 인생, 감사해야 할 대사건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무슨 수로 다 옮기랴. 화가 나면 그릇에 물을 떠놓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라. 물기운이 마음의 화火 기운을 곧 다스려줄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지녀라. 불편하거든 자기가 여섯 살인 아이(남자 일곱 살)라고 생각해라! 그때의 몸과 마음의 생기와 약동을 떠올려봐라. 인생에 대해 미소를 지어라. 남에게 항상 좋은 파동을 전하라!

p. 218-220 마음자리를 맑디맑게 닦을 뿐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품어 기른 자연일까. 지혜를 준 스승일까. 아니면 만나고 사랑하고 다툰 세상 전체일까. 그는 인간의 삶이 단순히 현생에서 끝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
“보통사람은 감정을 돌에 새겨. I hate you라고. 집착이지. 거기 크게 얽매일 수밖에 없어. 수행을 한 사람은 모래 위에다 글씨를 써. 파도가 오면 글씨는 곧 쓸려나가버리지.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거야. 도인은 물 위에 글씨를 써. 쓰는 순간 지워지지. 부처는? 부처는 허공에다 쓴다고. 부처라도 아예 쓰지 않는 건 아니지. 써도 아무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