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10-02 13:02
[165호] 여는 글 - 연휴(連休), 멍때리거나 잘 쉬거나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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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連休), 멍때리거나 잘 쉬거나

오문완


이런 식의 언어유희(言語遊戲, Word Play)가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한테 즐겨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무엇이냐, 묻습니다. 이상향(理想鄕)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왜 이상향이라고 번역하냐고 묻죠. 이제는 대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말을 걸죠. 유토피아는 Utopia=no place=nowhere라는 등식을 설명합니다. 이제 언어를 가지고 놀 시간입니다. no/where를 now/here로 끊어 읽으면? now here가 됩니다. 결국은 이상향은 ‘지금 여기’(now here)에 있다는 거라고 정리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너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을 주문하죠. 같은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지난 연휴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문학동네, 2006)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을 읽는 건 푹 쉬는 일입니다. 책의 내용은 살인을 취미 삼아 즐기는 연쇄살인범 얘기라 너무 끔찍해서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두꺼운 책 3권이라 분량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저는 무지 겁쟁이인데 제 속의 악마가 이걸 읽으라고 부추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일본의 소설은 사소설(私小說)의 전통이 강해 추리소설(탐정소설)도 사소설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고 미국 소설에 익숙한 이들은 일본의 추리소설은 밋밋하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다루는 내용은 일련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모방범이냐 독창적 범죄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이지요.
마에하타 시게코라는 작가가 일련의 살인사건이 이미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의 재탕이라고 범인을 도발합니다. “모두 이 책에 적혀 있습니다. 사실이에요. 십 년 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십일 년 전입니다. 저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사건도 십일 년 전의 이 사건을 아는 범인이 이 내용이 일본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흉내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졸한 흉내입니다. 거창한 모방범이지요. 읽으면서 제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였으니까요.”(3권, 464쪽)
이에 범인 아미카와 고이치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외친다(모방범이 아닌 독창범). 목에 핏대를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어떤 음향효과에도 지지 않을 만큼 분명하게, 그 자신의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멍청한 모방범이 아냐. 마에하타 시게코, 당신이야말로 모방범이야! 흉내를 낸 건 당신이야. 내가 이룬 것을, 내가 만든 각본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구리하시 히로미의 마음속 어둠이니, 다카이 가즈아키의 뿌리 깊은 열등의식이니, 아는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 글을 쓴 건 바로 당신이잖아! 당신은 제 머리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해….”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아미카와는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해! 전부 내가 생각해낸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오리지널이야! 구리하시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어. 그놈은 각본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어. 그저 여자를 죽이고 싶었을 뿐이야. 다카이 가즈아키를 끌어들인다는 계획도 모두 내가 생각해낸 거야. 내가 각본을 쓰고 실행한 거란 말이야! 모델은 없어! 흉내가 아냐! 나는 모방범이 아냐!”(3권, 466-467쪽)

아리마 요시오라는 노인네는 범인과 통화하면서 사건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합니다. “세상을 얕보지 마. 만만하게 보면 안 돼. 네놈에게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줄 어른이 주위에 없었겠지. 어렸을 때 그걸 확실히 머릿속에 심어줄 어른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이렇게 돼 버리고 말았어. 이, 사람 같지 않은 살인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3권, 482쪽)

결국 교육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건 무얼 가르치느냐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얼 가르치죠?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공자님의 정명(正名)에서 시작할 도리밖에 없습니다(실은 서양에서도 이치는 같은데 그곳은 Nomen est Omen=Name is symbol의 정신이 있습니다).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이런 문답입니다.
자로가 말하길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맡기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반드시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고 싶다.”
자로가 말하길 “여전하시군요, 선생님의 우원(迂遠)하심이란. 어찌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신다고 하는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답답하구나, 유야.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는 법이다.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으며,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으며,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맞지 않게 되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이름을 세우면 반드시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함이 없을 따름이다.”

말을 바로 세워야 한답니다. 지금 정치판에 떠도는 말들을. 9월 26일 자 한겨레신문은 <말의 격, 정치의 격, 나라의 격>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읽어보시기 바라며, 이외수 선생의 우화를 들려 드립니다.
오늘의 발견: 컴퓨터 모니터에 육안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좀벌레가 기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좀벌레는 부드러운 모음만을 갉아 먹는 특질을 가지고 있으며 사용자들에게 자음만으로 단어를 판독하도록 만드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있다. ㅅ-ㅂ-ㄹ-ㅁ(시-발-라-마), ㅈ-ㄲ(조-까), ㄱㅅㄲ(○○○), ㅂㅌ(변태) 따위의 기형적 표기들은 모두 이 좀벌레에 의한 모음탈락현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이외수, 《하악하악》, 해냄, 2008, 190쪽)

오늘 우연히 만난 제자가 50이 돼, 결혼 11년 만에 딸을 얻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군요.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삶이. 매리 올리버의 말씀으로 정리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
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걸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10월에도 연휴는 이어집니다. 연휴(連休), 멍때리거나 잘 쉬거나!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인권연구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