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01 11:03
[162호] 여는 글 - 개미와 ‘배짱이’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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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배짱이’

이선이


작년 이맘때 우연한 기회로 팔자에도 없는 tv 출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울산mbc에서 노동절 특집으로 기획한 ‘일하는 그대 리스펙’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매회 우리 주변의 노동자들을 모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응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쑥스러워서 출연 사실도 함구하고 있었는데, 반년 넘게 본방과 재방을 거듭한 덕분인지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방송을 보았다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무려 공중파에서, 그것도 주말 저녁 황금시간대에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인권 이런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너무 좋았다는 말씀들을 해주시더라구요.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만난 분 중에 울산 mbc 아나운서 박성은님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무려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울산 mbc에 입사했다더군요. 저에게 ‘아나운서’는 ‘연예인’이나 다를 바 없는,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와 예쁘다”, “와 목소리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아나운서에게 그것은 칭찬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사교적인 대화만 나누다가 헤어졌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그분은 다시 그분의 세계로, 저는 저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박성은 아나운서가 저에게 “나중에 노무사님과 방송을 같이 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정말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정식 방송은 아니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노동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대본 쓰고, 편집하고, 자막넣고 하는 일들을 모두 자신이 하겠다고 하면서요. 회사에서 별도로 지원이나 보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본인의 ‘의지’로, 심지어 재미도 없는 ‘노동법’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그 후 둘이서 어찌저찌 몇 편의 컨텐츠를 만들었지요. 대장동 50억 퇴직금 사건이 터졌을 때는 퇴직금 계산법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하면 50억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하고(결론 : 월급이 250만 원이면 2천년만 근속하면 됩니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이 핫했을 무렵에는 쌍용차 노동조합의 구호였던 ‘함께 살자’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 둘이서 만든 컨텐츠는 사실 인기는 없었습니다. 인기는 고사하고, 조회수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이걸 누가 보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박성은 아나운서가 똘망똘망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세상에 노동인권에 관심있는 젊은 아나운서가 있다니!”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기 때문에, 제 나름으로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좀 더 판이 커졌습니다. 이번에는 울산mbc 유튜브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노동법 이야기를 하고, 노동상담을 하는 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성은 아나운서가 유튜브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때 “제 꿈은 라방이에요!”라고 해서 “라디오 방송이요?” 되물었더니 “아니요, 라이브 방송이요”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는데, 정말로 라이브 방송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행히(!) 평일 낮에 하는 것이라 실시간 접속자가 많지는 않습니다.

이 프로그램 제목이 ‘일개미 상담소’입니다. 일개미들이 일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상담해주는 시간인데요, 첫 회 방송을 할 때 박성은 아나운서가 멋진 인사말을 써왔더군요. “일개미들이 모두 배짱 있게 일하는 그날까지 일개미 상담소가 함께 하겠습니다!”라구요. 정말로 ‘그날까지’ 방송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배짱 있는 개미’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직장문화가 바뀌고, 직장 문화가 바뀔수록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바뀌어 간다는 것이겠지요. 주 52시간도 흔들리고, 최저임금도 흔들리고, 특고 노동자들의 파업권도 흔들리는 요즘, 더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개미와 배짱이’를 생각해 봅니다.

※ 이선이 님은 민주노총 법률원 울산사무소와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