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6-03 17:42
[161호] 이달의 인권도서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김승섭 저 / 난다 2022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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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 한국 사회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김승섭 저 / 난다 2022 / 정리 : 이세호



# 전주
“천안함 피격사건은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 772 천안이 조선 인민군 해군 잠수함의 어뢰에 의해서 격침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기사내용)

폭침 당시 천안함에는 전사한 46명과 함께 기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58명의 생존장병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폭침의 원인과 군사적 대응에 초점을 맞출 뿐 생존장병이 경험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었습니다. 천안함 폭침과 관련된 숨겨진 진실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존장병을 생각했을 뿐 사건 이후 그들이 생존자이자 피해자로서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와 상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생존장병은 사건 이후 군대에서는 조직 차원의 작전·정보 실패를 현장 장병들의 경계실패로 돌리며 만들어진 ‘패잔병’ 낙인으로 고통받았고, 전역 후에는 자신의 상처를 악화시키는 음모론과 악성 댓글에 노출되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 1부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고 8년이 지나고 만난 생존장병들은 아직도 그 트라우마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생존장병은 탈출구가 없는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면 불안도가 높아져 아직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있었고, 또다른 생존장병은 업무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리면 팔과 다리가 오그라들고 동공이 풀리는 발작 증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장병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천안함 장병들과 악수를 하는데 가만히 보니 그 남자가 손을 건네는 사람은 모두 사망한 장병들이었습니다. 악수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악몽이 반복되었습니다.

PTSD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정신과 질환입니다. 폭침을 경험한 생존장병 중 40.9%는 함수와 함미가 폭파로 나뉜 상태에서 인양된 천안함으로 다시 들어가 유품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천안함 폭침 시신을 감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장병 역시 27.3%에 달했습니다. 생존장병들이 사망한 장병들과 함께 천안함에서 생활했던 만큼, 배의 구조도 잘 알고 유품에 대해서도 잘 알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사건 발생 직후의 이런 명령이 생존장병을 처벌하기 위한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진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군 지휘부 입장에서는 이게 유품을 찾기 위한 가장 손쉽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단순하게 사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트라우마는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경험이기에, 그 회복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안전을 취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군에서 사망한 동료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전우로서 예의이거나 혹은 지휘관으로서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같은 대형 재난의 경우 국제기준에 따르면 시신의 신원확인에 최소 2주가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유가족들이 시신의 신원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를 기다리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시신을 인도 받아 장례식을 치르기를 바랐습니다. 정낙은 법의관은 “대형 재난에서는 초기 신원 확인이 아주 중요하다. 초기 1명의 신원 확인이 잘못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1명도 신원이 바뀐다.”라고 대형 재난에서 초기 신원확인의 정확성을 말합니다.

이 조사가 생존장병에게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트라우마를 겪고 나서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조사에 임해야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천안함 사건 즉시 최원일 함장은 어뢰에 의한 피격이라고 보고를 올렸지만, 해군작전사령부를 거치며 이 내용은 삭제되었고 청와대에서는 선체 파공으로 인한 침몰로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당시 조사단은 생존장병들을 의심하고 있었고 피의자처럼 다루기도 했습니다.

생존장병들의 발언이 진실되지 않고 짜 맞춘 듯하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군복이 아닌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등장한 생존장병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참사 후 불과 2주 뒤에 트라우마를 겪은 장병 전원을 대상으로 한 공개 기자회견은 하지 않는 게 맞다고, 만약 기자회견이 불가피했다면 모든 생존장병이 군복을 입도록 해야 했습니다. 천안함에 다시 들어가 사망한 전우의 유품을 찾거나 국군수도병원에서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고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해야 했던 경험이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단원고 김은지 선생의 인터뷰 중에
“2년 동안 단원고에서 일하며 희망이 꺾여 나갔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환자 치료다. 치료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응급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행정은 달랐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거나 규정만 따지면서 시급한 일을 미뤘다. 훌륭한 자원이 많았음에도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해 어떤 일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최근 여러 정치적 변화를 보면서 다들 기뻐하고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한국 사회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자신도 바뀌어야 한다.”

※ 나머지 내용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