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9-10 12:10
[45호] 일본 인권 답사기(후쿠오카현 4/11 ~4/15)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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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l 울산인권운동연대 인턴

동구인권기본계획 용역을 착수 한지 이제 막 한 달 쯤 되었을 무렵 난 처음 맡아보는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바쁜데 정작 무엇 때문에 바쁜지 모르겠고 일은 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사무국장님의 무수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하루하루 일을 처리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렇게 매일 일을 처리하고 이제는 비용관련 서류 작성에 익숙해 졌다고 자만(?)할 때쯤, 나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일본현지답사 비용 처리 서류였다. 작성해야 할 것도 많고, 금전 계산도 환율을 넣어 계산해야 하고, 같이 사용해야할 공금 비용도 관리해야 하는 등 4박5일의 해외방문이라는 설렘 보다 일처리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압박감 속에서도 여유는 있었던 것일까? 나름 제출 서류를 마무리 지어가자 일본방문이라는 설렘이 조금씩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4/11일 아침 일찍 굵은 빗줄기를 뚫으며 투표를 하고 (박영철)사무국장님, (윤)경일이 형, (최)성호 형과 함께 부산 공항으로 향했다. 비는 제법 많이 왔지만 다행히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 정도여서 다행 이었다. 비행기 이륙 후 몇 분이 흘렀을까? 이륙하자마자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가는 것보다 빠르다는 느낌이었다. 공항에 내려 숙소로 이동하면서 거리를 보았다.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일본어 간판이며 좌우가 반대인 도로모습을 보며 내가 일본에 와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에는 이미 (김)태현이 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현이 형은 일본에서 생활한지 10년이 넘었고 우리가 방문해야할 시청 및 단체들과의 약속을 미리 잡아 주시고 통역까지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치쿠시노 시의 인권 담당관을 만나러 출발 하였다. 출발하기 전 일본에서 먹는 내 인생의 첫 일본음식은 우동이었는데 정말 한국우동하고 별반 다를 것 없이 맛이 없었다. 치쿠시노 거리를 걸으며 본 아기자기한 일본주택의 모습과 차들은 다시 한 번 내가 일본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풍경을 보며 걷다가 어느 덧 시청에 도착하였다. 시청 건물은 울산 시청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 보였지만 그만큼 검소하고 소박한 일본사회를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인권담당관들과의 면
인턴일지
담이 시작되었다. 태현이 형의 능수능란한 일본어 실력으로 난 무리 없이 면담의 내용을 기록 할 수 있었다. 나중에 방문한 곳의 면담과 공통된 내용이긴 하지만 일본사회에서 인권은 ‘부락민차별문제’를 제외하고는 설명이 될 수 없었고 지금 만큼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부락민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쿠시노시에서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인권행사, 홍보물 만들기 등의 노력을 한다고 답변해 주었다. 담당관들은 우리의 질문에 시종일관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즉석에서 요구한 자료를 직접 제공하는 등 거만이나 무시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친절한 치쿠시노시의 공무원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하루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는 저녁을 먹으러 가야했다. 일본에서 사용할 돈은 내가 관리를 하고 있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벌써 택시비와 전철비용, 점심 값 등 예상 범위 내의 지출이었지만 돈을 가진(?)사람으로서 저녁 가격은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은 첫 날 이었다. 회전 초밥가게에서 피사의 사탑을 쌓으며 먹었다.(이후 아침마다 한국에서 사온 라면으로 해결 하였다.) 그리고 일본술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먹었고 숙소에 와서는 한국에서 사온 술을 마셨지만 다음날 미팅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본 첫 날밤의 설렘은 아니였다. 경일이 형의 신칸센 열차, 국장님의 고속기차, 성호형의 고장 난 전철의 소리 그리고 작은 방에 울리는 입체음향(?)은 날 잠 못 이루게 만들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고 맞이한 둘째 날, 아침 일찍 약속장소인 쿠르메 시로 향했다. 다행히 쿠르메시청 담당자들과 인권센터관계자들이 함께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여 오후 시간은 조금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쿠르메 인권센터에 도착하고 회의를 시작하였다. 시청 담당자들은 젊은 사람들이었지만 센터 관계자들은 고령으로 이미 정년퇴임을 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회의 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곳과 같은 인권센터에서는 퇴임한 공무원들이 무보수(차비정도만 지원 받고 연금으로 생활함)로 일을 하고 있어 재정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회의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담당공무원들 보다 (쿠르메로 발령받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랬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인권센터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답변해 주었으며 심지어 시청 공무원들도 센터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회의가 마무리 되고 관련 서적과 자료들은 엄청나게 주셨다.(방문한 모든 곳에서 자료를 많이 주셨지만 이 곳에서 제일 많이 주셨다.) 자료가 많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가지고 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무거운 짐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뜻밖에 생긴 여유 시간사용에 대한 짧은 논의가 열렸다. 결론은 간단했다. 젊은 나는 나가서 돌아다니고, 형들은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때 만나자는 것이었다. 일본어 한마디 못하는 내가 일본 시내를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에 조금은 겁이 났으나 시간이 아까워 돌아다니기로 하였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오호리 공원’이었다. 이 곳은 몇 년 전, 오(문완) 교수님과 경일이 형의 추억(?)이 있다고 강력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추억의 흔적(?)을 찾으러 용감하게 지하철 타기에 도전 하였다.
인턴일지
2번에 걸친 나의 유창한 한국식 영어와 역무원들의 유창한 일본식 영어 커뮤니케이션의 결과 무사히 ‘오호리 공원’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오호리 공원’을 보니 도심 한 가운데 이렇게 넓은 호수가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달리기 연습 중인 육상부, 데이트하는 커플, 기타 치는 사람, 까마귀에게 먹이 주는 아저씨 등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들이었다. 한참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다가 저녁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숙소로 돌아갔다.

세 번째 날, 아침부터 경일 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러 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마지막 방문 장소는 ‘부락해방동맹 단체’와 타가와 시였다. 부락해방 동맹에서의 면담은 일본사회에서의 부락차별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만 아직도 일본사회에는 신분차별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부락민들과 결혼을 반대하는 심각한 사회 분위기였다. 면담이 끝나자 국장님, 경일이 형, 성호 형 그리고 나까지 모두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러한 충격을 간직하고 타가와 시로 향했다. 타가와시는 지금까지 방문했던 도시들과 다르게 제법 규모가 큰 도시였고 시청의 건물 또한 도시규모에 어울렸다. 타가와시에서는 인권증진을 위한 세부적인 프로그램들과 관련된 시스템들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특히, 인권교육 강사 양성과 보유 현황은 정말로 대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시민들에게는 정작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쿠르메 시 주관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들 대부분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인권도시로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결과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에 다소 실망 할 수도 있겠지만 담당자는 인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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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은 침해당할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한시도 소홀히 해서 안 되기 때문에 사업을 계속 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담당공무원들의 인권감수성이 중요하다고 되새기게 되었다.

어느덧 우리가 준비해온 방문 일정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에는 개인비용을 각출하여 이어지는 1박2일의 일본여행이었다. (태현이 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공무수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타케오 온천으로 향했다. 그 곳 온천에서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일본 전통 음식을 먹으며 온천을 즐겼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나막신 까지 신은 나의 모습은 영락없이 일본사람이라고 형들이 이야기 했다. (지금도 친구들은 이 사진을 보며 일본인 같다고 한다.) 거울을 보니 부정 할 수 없었다. 꽤 잘 어울렸다.

모두들 지친 일정이어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4일 째 아침, 경일이 형은 아직 몸이 좋지 않아 국장님과 성호 형 이렇게 3명이서 올레 길을 돌아 다녔다. 이 곳 올레 길은 최근에 한국인 사이에 인기 있는 장소로 3,000년 된 나무가 2그루나 있었다. 어마어마한 높이와 둘레 그리고 울창한 하다못해 신성하기 까지 한 나뭇가지와 나뭇잎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작아 보였다.

점심은 일본답사 기획안에도 포함 되었던 ‘이데 짬뽕’을 먹으러 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다행히 조금 일찍 도착하여 가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고생은 안하게 되었다. 나가사키 짬뽕과 쌍벽을 이룬다는 소문(?)을 국장님에게 듣고 있던 난 기대하였다. 육고기로 우려낸 육수라서 조금 느끼할 것으로 예상했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맛을 보았다. 딱 내가 예상한 만큼의 느끼함으로 무리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공무수행과 여행의 일정으로 지친 우리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 근처에서 숙소로 돌아와 아쉬운 밤을 다시 태현이 형과 달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술자리는 조금 오래 지속 되었고 정말로 지친 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누었다.
다음날 형들은 이번에는 내가 코를 골며 잤다고 했다. 하지만 난 기억이 없다. 공항에서 태현이 형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를 탔다.

처음 방문한 일본에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과 인권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만큼 함께 간 형들과 조금 더 친해 질 수 있어서 여러모로 뜻 깊은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