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석 한 l 편집위원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1987년 6월이었고 데모를 많이 한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던 시기였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집은 현대자동차 앞이고 학교는 공업탑 인근에 있었던 터라 시내에서 데모를 하면 버스가 못다녔다. 데모를 해서 버스가 끊길 정도면 학교에서 방송을 통해 북구와 동구에 사는 학생들은 일찍 보내주곤했다. 데모 덕에 야간자율학습을 공식적으로 재끼는 것이었다. 집에 가다가 시청 근처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은 보았지만 데모란 뜻도 몰랐고 그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설명해 줄 사람도 없었다. 6월까지는.
한 장의 유인물이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다. 6월 10일날 어디어디서 데모를 하니 모여달라는 내용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유인물이 집에 오면 학교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대신 뭘 준댔다. 당시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이 좀 시끄럽다는 것밖에 몰랐다.
7월이 되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도 데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울산대학교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무거동 인근에서 터진 최루탄이 바람을 타고 산을 넘어 내가 다니던 학교까지 날아온 것이다. 우리들과 선생님들은 연신 기침을 하고 코를 흘리고 창문을 모조리 닫곤했다. 선풍기도 없던 때여서 더운 날 창문까지 닫아 버리니 여간 고욕이 아니었다.
여름방학이 되어(사실 그 당시 방학이란 개념은 잠깐 며칠 쉬고 언제나 그렇듯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해야 하는 좋긴 좋은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친구들의 형이나 누나들이 울산에 내려오면서 내 친구들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광주가 어떻고 전두환, 노태우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당에 다니는 친구는 ‘천구교 광주교구’라는 곳에서 발행한 광주항쟁 사진첩을 학교로 가지고 와서 보여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시체 사진을 보았다. 한두명이 아니었다. 수백수천의 시신이었다. 또 군인들이 사람을 때리고 무릎을 꿇리고 차에 싣는 등의 사진도 많았다.
8월이 되자 아예 울산에 버스조차 안다니는 때가 왔다. 버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것이다. 더운 여름날 공업탑에서 양정동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혹시라도 몰래 운행하는 버스는 여기저기서 날라온 돌을 맞아야 했다. 연말 우리 반 아이들은 대통령선거 모의 투표도 했다.
대학에 와서야 나는 내가 겪었던 울산에서의 1987년 여름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고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이 됐다.
비껴갈 뻔했던 역사적인 시기에 다행히 나는 울산에서 그것을 보았고 그로 인해 나와 더불어 우리 가족에게도 1987년의 대사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와 두 동생들은 운동권 학생이 되어 졸업 이후 운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나의 작은 아버지는 1989년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대의원으로 살았고 나의 어머니는 저절로 진보정당 지지자가 되었다. 1987년의 여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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