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10-21 17:23
[69호] 여는글- 가을비 내리는 날에
 글쓴이 : 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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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옵니다. 가을비가 내립니다. 태풍‘풍윙’이 몰고 온 세찬 비지만 어제가 추분이었으므로 가을을 적시는 비로 손색이 없습니다. 이 비가 그치면 하늘은 더욱 높아지고 나무는 생각이 깊어집니다. 세월의 무게를 덜어냅니다. 영욕의 인간사를 덮기라도 하듯 낙엽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9월의 소식은 이제 나무가 되어, 낙엽이 되어 쌓여갑니다.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어느 판사의 탄식으로 쌓이고, 비정규 노동자들의 환호로 쌓이고, 선생님들의 되찾은 미소가 되어 쌓입니다. 어쩌다 우리사회의 상식과 순리가 법정에서 다툼이 되고, 결정이 되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사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슴(鹿)을 가리키고 말(馬)이라고 우겨댄다는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는 태자 부소를 죽이고 자신이 다루기 쉬운 어린 호해(胡亥)을 황제로 옹립하였습니다. 어느 날 허수아비 황제 호해에게 조고는 사슴(鹿)을 가져와 말(馬)을 바친다고 말했습니다. 황제 호혜는 “사슴을 보고 말이라 한단 말이오?”라고 했습니다. 많은 신하들이 “말이 맞습니다.”고 했고, 몇 명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습니다. 환관 조고는 후에 진실을 말한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이 일로 조고에 반대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원세훈 국정원장 관련 선고재판에 대해 ‘지록위마(指鹿爲馬)’판결이라며 비판한 김동진부장판사의 글에 나온 작년 가을입니다. 현직판사인 그는 올 가을 9월 12일 <법치주의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6일 뒤 절망 속에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9월 18일 오후2시 서울중앙지법 562호 법정은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에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을 인정하고 사내하청은 정규직임을 선고하였습니다.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소속 정규직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지만 기쁜 일입니다. 그동안 현대차의 불법파견을 둘러싸고 220명이 해고됐고, 2명이 분신했습니다. 울산공장에서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20명이나 구속됐습니다. 오늘 현대차 사측은 항소를 한다고 합니다. 노동부가 이미 2004년 현대차를 근로감독한뒤 9200여개 생산공정이 모두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음에도 10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이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희망입니다.
9월19일 서울고등법원은 전교조가 고용노동부장관을 상대로 낸 법외노조 통보처분 취소 가처분 신청을 “법외노조 통보 처분의 근거가 된 교원노조법 제2조가 헌법이 보장한 단결권과 평등권을 침해했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받아들였습니다. 1심 판결이 나자마자 전교조 무력화에 나선 박근혜정부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그나마 희망입니다.

이 박근혜 정권에서 법치를 앞세우고 이루어지고 있는 정적 죽이기는 패도정치(覇道政治)의 전형입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을 일삼으며 조아리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줄 세우기에 양심과 정의는 숨죽여 기다리나 봅니다.
 
‘세월호’특별법도 이 가을에 희망이 되어 오기를 기다립니다.

가을엽서  - 안도현

가을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곳에 있는지를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지요? 깊어가는 가을하늘 저 높은 곳엔 사랑이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