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4-29 10:05
[76호] 여는 글
 글쓴이 : 인턴3
조회 : 8,806  

발톱을 깎으며

오문완 l 공동대표


웬 발톱? 엊그제 일입니다. 밤에 혼자 집을 지키다가 발톱을 깎는데 신기한 일을 겪었습니다. (혹시 술기운 때문이라고 반문하신다면 딱히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기는 합니다만) 오른발보다 왼발의 발톱들이 훨씬(약3배 정도?) 깎기가 어렵다는 순간의 깨달음을 얻은 겁니다. 이게 저만의 현상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일인지는 여러분을 만나 뵙고 얘기를 주고받아야 알 수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여하간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 살펴봐야 할 터인데, 이런 식의 가정이 있겠습니다.

하나는, 오른손잡이한테는 왼발의 발톱 깎기가 더 어렵다. 다른 하나는, 평소 왼발을 (오른발보다) 무시한 데 대한 왼발의 반란이다. 그리고 또……. 그런데 그 원인은 잘 모르겠고, 결과는 왼발에 대한 애착을 (오른발보다 더) 갖게 되더라는 겁니다.

세상사 이치가 이러하겠지요. 우리한테 친숙하고 고마운 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조금은 먼, 무언가 큰(크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게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을요.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고 애통해하는 그 모순을.. 유행가 가사마냥 “있을 때 잘해”입니다.

이를 인권이라는 담론으로 끌고 오면,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의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 작은 곳에서,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부터 모든 남녀노소가 공평한 정의, 기회균등, 차별 없는 존엄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 어떤 곳에서도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곳, 가까운 곳에서 찾는 작업이라는 게 결국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일이겠습니다. 나의 아픈 부위에서 몸과 마음 전체의 아픔을 느끼고 공감을 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일로 넓혀갑니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 나라 전체, 지구 더 나아가서는 우주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게 되겠지요. 그런 느낌을 나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같이 하게 될 때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이웃이라는 존재가 우리 동네의 이웃만이 아니라 지역 전체, 나라 전체, 지구 전체, 우주 전체로 확대될 터이니까요. 한 해가 지나고서도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의 아픔도 유가족의 아픔을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될 때 치유가 가능할 것입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 제라드 홉킨스(Gerard Hopkins)라는 빅토리아 시기 영국의 사제 시인은 <인스케이프>라는 시에서 그런 세상을 그려 보여줍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르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
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누구의 뜻인가?


이런 세상은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