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주의(ageism)
김석한 l 회원
한 15년 전의 일이다.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모인 자리. 큰 공간에 서로들 앉아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처음에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자신이 몇 살 인지를 말했다. 그렇게 되다보니 옆에 있는 사람도 그 옆에 있는 사람도 순서가 돌아 자신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다들 나이를 말하게 되어버렸다.
30살인 한 활동가는 나이가 계란 한판이라며 우스갯소리 까지 넣었다. 그러다 소개 시간이 끝나자 한 활동가가 갑자기 일어나서 문제제기를 했다. 기억은 잘 나질 않지만 아마도 나이를 얘기하는 것은 나이주의(ageism)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당시는 나이주의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뭐가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울산에서 처음으로 청소년들이 학내 집회를 계획할 때였고 실행할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집회를 주도했던 학생과 함께 이에 대한 도움을 얻고 연대를 요청하고자 전교조 울산지부를 찾았다. 이미 교내 집회와 시위를 주도해서 학교 측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던 학생이었다.
울산인권운동연대 등의 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집회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기본권”이라고 반발한 터였다.
그런데 당시 전교조 울산지부에서는 학생만 따로 불러 “너희들의 기본권을 존중하지만 학교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 있어 위험 할 것이니 자중하기를 권한다.”고 했다.
도움을 받으러갔던 청소년은 “선생은 진보나 보수나 똑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생이 들먹인 어휘가 ‘나이주의’였다. 내가 좀 당황하기도 해서 뭐라고 답을 못했다.
나이주의(Ageism)는 미국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인들에 대한 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1968년 로버트 N. 버틀러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과 어린이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설명하는 경우에 사용되며, 주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특정한 규범을 강요하는 것을 일컫는다.
경기도학생인권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이셨던 (지금도 그 직책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조성범씨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당시부터 겪은 난항을 얘기하면서 “일부 보수언론과 정치권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정치적 이념의 잣대로 재단한 탓이 크다. 그러나 학생인권정착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고정관념이다. 이른바 나이주의(Ageism)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성세대는 학생(비학생 포함 청소년)들이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미성숙하다고 전제한다. 성숙의 판단 잣대가 바로 나이다. 살아 온 세월과 경험 속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전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살아온 세월이 좀 짧다 하여 무조건 미성숙하다는 생각은 편견이요 아집일 뿐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삶의 과정에서 가치 있는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이지 결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제일 진보적인 공동체로 기억하고 싶은 녹색당에서 마저 나이주의를 강요하는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청소년들을 보았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나이주의와 보호주의에 강력히 충돌하는 집단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경험했을 나이주의는 당하는 청소년들에게는 많은 실망감을 준다. 특히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이와 관련된 어휘와 ‘꼰대’적인 행동들이 나왔을 땐 그 실망감이 더할 것이다.
얼마 전에 외삼촌과 길을 걷다 다 큰 아저씨에게 큰 소리를 치는 어느 어르신을 보았다. 무슨 다툼이 있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외삼촌께서 하시는 말씀.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뭔지 알아? 나이 먹는 거다.”
나이주의가 인권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부터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꼰대’란 말 듣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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