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3-30 11:26
[75호] 여는 글
 글쓴이 : 인턴3
조회 : 8,963  

인권 감수성, 젠더 감수성

송혜림 l 이사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길은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할 새 길이다.”


김 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문학동네)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지나놓고 보니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 겨울이 있기는 있었을까 아득하기만 한데요. 어느새 봄은 왔고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네요. 누군가에게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봄, 교복을 벗고, 취직을 하고 혹은 엄마나 아빠가 되어 처음 만나는 봄, 사랑하는 연인과 처음 함께 하는 봄, 누군가와 이별 후 처음 홀로 맞이하는 봄,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혹은 퇴직을 하고 처음 맞이한 봄, 지금은 몰랐으나 사실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봄....이렇게 생각해 보면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지만 늘 새로 만나는 길이 되기도 하겠지요. 어떤 이에게는 설레임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쓸쓸함으로, 그리고 또 다른 이에게는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다가오는 봄이 시작하는 3월, 세계 여성의 날이 있어 많은 뉴스들이 나왔는데요. 이제는 여성파워다, 남성들이 기를 못 펴고 사는 세상이다, 법이나 제도 덕분에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은 안 그런 것 같군요. 지금은 대놓고 여성을 차별하기 보다는 오래된 관행, 조직문화, 편견 등의 영향이 큰 것 같은데, 그래서 유리천정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올 해 ‘세계 여성의 날’ 즈음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발표에 따르면, 28개 OECD 회원국 중 ‘유리천장 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데요. 제도와 법이 미치지 못 하는 인식이나 문화와 같은 측면에서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무척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분명 차별이 있으나 문제로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 가정 안에도 많이 있을 텐데요. 가정은 사생활의 공간이고 아무나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학대, 차별, 억압은 손 쓸 새도 없이 발생하고, 한 번 발생하면 즉시 해결 안 되니 계속 쌓이고,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고, 또 그래서 더욱 풀어내기가 힘든 측면이 있지요. 요즘 맞벌이 가정이 보편화된다는데요, 같이 퇴근 후 남편은 소파에 누워 휴식을 하고, 아내는 정신없이 식사준비를 하고 아이를 챙긴다.., 익숙한 그림이지만, 이건 분명 차별인데, 대부분 이를 문제로 제기하지는 않지요.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기도. 그러나 차별을 문제로 제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니겠지요. 50% 이상의 여성들이 취업을 하는 현실에서도 보육시설과 학교는 학부모라는 이름으로 늘 엄마를 부른다, 아주 당연하게. 이거 역시 일하는 엄마들에게는 억압이고, 남성과 비교할 때 분명 차별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사소한 걸 뭔 문제라고? 누군가 물으신다면 페미니즘이 강조하는 명제,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 사소함과 일상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일상의 정치학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많은 일들을 ‘양성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보고 제대로 보자, 젠더 감수성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젠더 감수성으로 가족에서의 차별 역시 인권문제로 접근할 수 있겠지요. 여성의 경우, 직장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치지만, 가정에서의 돌봄을 책임지고, 그래서 일과 돌봄의 이중노동부담을 겪고, 이것은 또 다시 경력단절로 이어지는 일상적 경험은, 가족 돌봄을 부담으로 그래서 피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겠지요. 돌봄이 기쁨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사회에 아이가 많이 태어날 리 없고, 노부모 돌봄은 또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될 것인가, 그러니 저출산 현상이 심화되고, 100세 시대를 맘 놓고 기뻐할 수 없는,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는 것이지요.

인권 감수성과 젠더 감수성을 합하여, 직장에서의 여성노동자 문제 뿐 아니라 가정 내에서의 양성 불평등한 역할 분담, 이것이 사회로까지 확장되어 발생하는 억압을 여성문제임과 동시에 인권문제로 보면서, 그 익숙한 관행에 이제는 시비를 좀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 송혜림 울산인권운동연대 이사님은 현재 울산대학교 아동가정복지학과 교수이시며, <사교육 없는 세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