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역사, 증언과 기억의 과제
최성용 l 울산인권운동연대회원
주디스 허먼은 『트라우마』에서 심리적 외상 연구의 역사를 사려 깊은 시선으로 그려나간다. 심리적 외상 연구는 “진행되다가 돌연히 중단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 사고가 금지된 곳으로 반복하여 추방되었으며, 그 신뢰성을 근본적으로 의심받았다.”
그 첫 번째 시기는 19세기말이다. 당시 서구 의학계에서 진행된 ‘히스테리아’ 연구가 폭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며 히스테리아 연구로부터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쌓은 이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활동하던 당대의 유럽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히스테리아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히스테리아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당시 히스테리아에 대한 일반적 시선은 “일관성 없는 증상을 드러내는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질병”이며 “이 질병이 여성에게만 나타나고, 그래서 이 질병이 자궁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이해를 거부하고 연구를 밀고 나간다. “프로이트는 진정으로 화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침묵을 거두고 감시를 근절시켰으며 광기의 실제 진행에 대한 성찰 속에서 광기의 인정을 거부했다.” 미셸 푸코의 찬사다.
정신분석의 주요한 기법인 자유연상과 대화치료는, 히스테리아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침묵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였다. 이로부터 프로이트는 하나의 결론을 맺는다. “히스테리아 환자들은 기억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다.” 외상 사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기억으로부터 여성들에게서 히스테리아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프로이트는 “나는 히스테리아에 관한 모든 사례의 밑바탕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나치게 이른 성적 경험’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즉, 여성들은 어린 시절 당했던 성적 학대의 경험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허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의 기원에 놓인 외상 이론을 비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 히스테리아는 너무 흔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환자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의 이론이 정확하다면, … 존경받는 부르주아 가족들 사이에서도 아동 학대가 빈발하다고 결론지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리고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는 오랜 기간 잊혀 진다. 1차 대전 이후 참전 군인들의 PTSD 증상으로부터 두 번째 연구의 시기가 찾아오고, 다시 잊혀진 뒤 1970년대에 이르러 세 번째 시기가 찾아온다. 70년대는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들의 PTSD 연구와 더불어, 제2의 물결이라 불리는 여성해방운동이 나타난 시기였다. 프로이트가 도달했으나 인정될 수 없었던 지점을 향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와 발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성의 삶은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고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당대 주요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베티프리던은 여성의 경험이 사적인 것으로 은폐되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이름이 없는 문제”라고 명명한 바 있다. 여성운동은 침묵을 지키던 여성들을 모아 소규모 그룹을 형성해 가정에서의 폭력과 강간에 대해 함께 증언하고 서로 들어주는 방식의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이는 “피해자가 사적이 삶의 장벽을 깨뜨리고, 서로를 지지하며, 집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하여 진실 되게 말하고 듣는 관계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찾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고통과 삶을 히스테리아나 사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회와 맞서 싸웠다.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망각과 기억투쟁의 역사는 서구의 일만이 아니다. 올해 들어 울산에 세 차례의 지진이 우리 삶의 기반을 흔들어댔다. 그 자체로도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지만, 사람들은 불안은 더 깊은 차원의 무의식에 닿아 있었다. 위기 상황에 대응해야 할 국가의 제도들은 전부 무력하고 늦장을 부렸고, 신속한 정보전달과 안전조치를 홍보해야 할 언론은 제 역할을 방기하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고, 그 외의 어떠한 공적인 제도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불신은 그저 이번 지진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공식적 제도들에 대한 불신은 오랜 역사적 기억들을 반영한 뿌리 깊은 무의식적 정서다.
제주 4.3의 기억, 한국전쟁기 한강대교를 끊고 피난을 간 대통령, 보도연맹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최근에는 80년 5월 광주와 용산 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대사에서 국가의 폭력과 무책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나마 5월 광주의 기억이 일정한 기억투쟁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대부분의 기억은 망각과 왜곡을 겪어야만 했다.
특별한 위기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묻어두고 산다. 굳이 그 기억들을 언어화하고 일상 속에서 증언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2년 전 세월호의 비극을 계기로 이 기억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국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윤일병도 그렇게 죽어갔고 메르스는 그렇게 사람들을 덮쳤다. 지진과 원전의 위협에서도 우리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졸지에 난민이 되어버린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는 ‘침묵의 언어’로써 국가로부터의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그 호소와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리고 사람들의 불신을 정치적 언어로 만들어내며 ‘국민을 위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절박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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