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오문완 l 공동대표
여는 글을 쓰라는 ‘압박’을 받고 글을 시작하려니 오늘이, 6·25라고 부를지 한국전쟁이라고 부를지 여전히 논란이 있는, 비극이 시작된 날로부터 65년이 되는 날이군요. 우선 그 비극 속에 스러져간 숫한 영령들께 그 슬픔을 잠시라도 느껴봅니다,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위 소위’ 하면서 날아드는 총탄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내신, 오래전에 세상을 뜨신, 아버님을 기억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하, 조금 무거웠나요. 그러면 이제는 가벼운 모드로. 술을 좋아하다보니 술자리가 잦습니다. 그 술자리에서는 숫한 말이 오가지요. 다음 날 깨어나서는 무슨 얘기를 한다고 그리도 긴 시간을 보냈을까 신기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의외로 많은 일들이 결정되고 실천되곤 하는 일에 놀라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실은’ 남의 얘기를 잘 듣는 일에서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요. 역사상 듣기를 잘 한 사람 중에는 솔로몬을 우선 꼽을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교회를 다니다보니 교회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남의 교회 얘기도 잘 들으면 사는 데 보탬이 된다고 믿습니다. 저 자신도 꾸란(코란) 공부는 못했지만 유-불-선 공부는 그럭저럭 했다고 자부(?)합니다.
여하튼, 솔로몬 하면 솔로몬의 재판이라고 알려진 사건(열왕기 상권 3,16-28)으로 유명하지요. 성서는 이 이야기를 “임금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임금을 두려워하였다”고 맺고 있습니다.(열왕기 상권 3,28) 즉 ‘솔로몬=지혜’라는 공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하느님이 주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그 지혜라는 것은 솔로몬이 기도를 통해 받게 되는데, 솔로몬의 기도는 이런 얘기입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기 상권 3,9) 이 기도에 하느님이 응답하시어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과 함께 (청하지도 않은)부와 명예도 주었다(열왕기 상권 3,10-15)는 것이지요. 여기서 초점은 ‘듣는 마음’을 청했다는 것이고 그게 곧 지혜라는 겁니다.
이를 동양식으로 풀자면, 들을 청(聽)자를 파자(破字)해보면 됩니다. 聽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왼쪽에는 耳(귀 이)자 밑에 王(임금 왕)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十(열 십)자 밑에 目(눈 목) 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씨가 있고, 그 아래 一(한 일)자와 心(마음 심)자가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즉 듣는다는 것은, 왕과 같은 귀(매우 커다란 귀)로 집중해서 듣고, 열 개의 눈으로 상대를 집중해서 바라보고(그의 표정이나 눈빛, 태도 등 보디랭귀지도 놓치지 말고), 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집중하라, 즉 네 마음을 온통 상대에게 맡기라고 풀 수 있겠습니다. 영어식으로 얘기하면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hear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listen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온 마음을 상대방에게 주는 게 듣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상대방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상태, 이게 곧 인권의 출발점입니다. 군자는 화이부동이요(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동이불화라(小人同而不和)는 말의 번역이 다양하게 있겠습니다만, 신영복 선생의 번역이 최고인데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고 풀이합니다.
이 구절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되 획일화하지 않는 것이 인권의 출발이자 핵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같이 밥을 먹으며(和=食口=companion)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자리는 인권의 출발점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인가요. 듣는 것을 잘 못하는 잘난 사람들을 굳이 탓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은 달 듣고 있는지 반성이 필요한 시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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