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7-08 09:44
[67호] 회원 글-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에게서 찾은 행복
 글쓴이 : 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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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혜경 l 인 턴

2013년 9월, 한국에 돌아온 지 채 2개월도 안되어 또 떠난다는 딸의 말에 놀라움으로 땅까지 떨어진 부모님의 턱을 제자리에 돌려 드릴 새도 없이 나는 뭄바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학 시절 배낭여행 이후 이번이 두 번 째인 인도 방문. 여느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이 인도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보여지는 미화된 세상과 그 경계선으로부터 신음하는 냉혹한 현실세계. 하얀 대리석으로 눈부시던 타지마할과 갠지스 강의 성스러운 새벽을 기억 저 편에 두고, 이번에는 경계선 밖의 진짜 인도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싯타르타가 4대문에서 생로병사를 경험하고 출가를 결심한 것처럼 나에게도 어떤 자극이 필요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뭄바이에서 기차로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칼라투르(Kalathur)는 내 첫 행선지였다. 이곳에는 120명 남짓의 꼬마숙녀들이 수녀님들의 보살핌 아래 생활하고 있는 보육원, “마리아 니와스”가 자리해 있다.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을 수줍게 문지르며 동그란 두 눈으로 눈두덩이가 편편하고 피부색이 그들보다는 조금 흰 이방인을 부지런히 관찰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가와 나를 서로 차지하려 애를 쓰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 한 편이 짠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님이 가난해 정상적인 양육을 할 수 없어 이곳 저곳에서 보내졌다고 했다. 보육원에 보내지면서 먹고, 입고, 씻는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결핍은 그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가난은 왜 이리도 가혹한가? 우울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마음을 다해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실수투성이인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삶과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바래다 주다가 가방을 활짝 연 채 걸어가는 아이를 발견했다. 가방 문을 꼭 잠그지 않아 집까지 입이 쩍 벌어진 가방을 매고 집에 왔던 내 어린 시절 기억이 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방 문 잠그고 가야지”하니 아이는 부끄러운 듯 웃더니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며칠 동안 아이들의 등굣길에 동행하면서 비로소 그 날 본 그 아이의 수줍은 미소를 이해했을 때,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은 행여나 잦은 비에 책이 젖을까 비닐로 꽁꽁 싸매서는 지퍼가 고장 나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책가방 속에 넣어 어깨에 걸치고 다니고 있었다. 조금 먹고 살만해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 눈앞에 보여진 그 아이의 가난은 충격이었고, 지구 한 켠에 만연한 빈곤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자발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마리아 니와스에서의 마지막 날, 파리말라라는 아이가 나에게 수줍게 다가와 꼭 혼자 보라며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공책을 찢어 만든 조그만 봉투였다. 방에 돌아와 꼬깃꼬깃 접은 봉투를 열어본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봉투 속에는 부러진 몽당연필 한 자루, 작은 연필깎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공부하려면 이리저리 연필 빌리러 다니느라 정신 없었던 녀석을 한 달 넘게 봐온 나는 그 선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내게 작별의 선물로 건넨 것이었다. 나는 내가 나눈 작은 사랑이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 한, 그리고 그 아이가 나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또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고 그것이 불러올 또 다른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지 않을까? 파리말라(향기로운 아이라는 뜻)는 그렇게 내게 진한 향기를 남겼다.


마리아 니와스의 소녀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뒤로하고 두 번째로 옮겨간 곳은 20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살고 있는 뭄바이 외곽의 마짜렐로 센터였다. 이 곳의 아이들은 너무나 해맑아 그들이 센터에 오게 된 사연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나같이 말괄량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거리의 아이들”이었다. 기찻길에서 공병을 주워다 팔고, 구걸을 하고, 그래도 안되면 물건을 훔치던 아이들. 가난해서, 여자아이라서 온갖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던 아이들은 다행히 수녀님들께 구제되어 센터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 번 밥을 먹으면 그 다음 끼니가 언제가 될 지 모를 길거리 생활에서 벗어나 삼시 세끼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아이들. 그 동안 내가 몰랐던 행복의 종류이다. 내게 담담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서투른 영어로 쏟아내는 아이들은 그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하면서도 생글거리며 웃는다. 카미니라는 아이는 홍수로 아버지를 잃고, 얼마 뒤, 엄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는 떠돌다 센터까지 오게 되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 말을 듣지 않으면 가끔 뺨을 맞기도 했는데 그래도 생글거리며 엄마를 약 올렸다며 무용담처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게워낸다. 지금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 있어서 더 이상 볼 수가 없는데 자기는 평생 뺨을 맞아도 좋으니 엄마가 다시 살아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작은 입술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가 겪은 불행의 단 1%도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감히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미안한데 그 아이는 오히려 나를 달랜다. 그 날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할 줄 몰랐던 내가 참 많이도 부끄러웠다.

세계 기아 인구의 약 40%가 인도인이라고 한다. 내가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의 수 천, 수 만 배가 되는 아이들이 아직도 길거리에서 굶주리고 있다는 말이다. 인도를 벗어나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지구를 보면 어떠한가? 세계의 부는 편중되어 있고 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게,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살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지속시키고 있다. 결국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더 나은 세상으로의 발걸음은 무거워 질 수 밖에 없다. 이제 배를 곯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은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에 조금 민감해질 여유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이 우리의 고통에 민감하였기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듯이 우리의 작은 관심과 온정이 그들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 희망의 씨앗을 다듬는다. 더 나은 세상으로 한 발 짝 나아가는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