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4-01 14:17
[183호] 이달의 인권도서 - 성서와 동성애 / 김진호 지음 / 오월의 봄 2020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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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동성애
- 혐오와 억측을 넘어 성서 다시 읽기 -

김진호 지음 / 오월의 봄 2020 / 정리 : 오문완



이 책의 첫 문단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5쪽 <들어가며>)

“인권이 왕 노릇 하지 않게 하옵소서!”
최근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어느 대형교회의 주일예배에서 대표 기도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그 예배의 간증 시간엔 레즈비언 커플이 나와서 자신들이 동성애자인 것과 10여 년간 함께 살아온 것을 속죄하고, 이제부터는 동성애자로 살지 않고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다. 담임목사는 설교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에 동참할 것과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서명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이어서 <2015년 성소수자 인식 조사> 결과를 들려준다.(가톨릭 신자는 49.4퍼센트가 ‘어느 정도/매우 거부감이 든다’ / 개신교 신자는 70.6퍼센트가 거부감 표시) 다른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는 시계열 자료인데 장애인이나 이주민에 대한 혐오에 비해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민중신학자(재야 신학자)인 저자는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 “왜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이토록 거부감이 강한가. 여러 요인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종교, 특히 개신교가 부정적 편견에 깊이 개입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전체 인구로 보면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20퍼센트 미만이지만 파워엘리트로 좁혀보면 40퍼센트 이상이 개신교 신자다.”(10쪽)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들이 동성애에 강한 편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서다.”(11쪽)

그래서 성서 속 동성애를 찾아보는데 <레위기> 20장 13절과 <사사기(판관기)> 19장 22절, 그리고 <로마서> 1장 26절과 <고린도전서> 6장 9절 정도에 국한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12쪽). 그런데 과연 이들 구절이 과연 동성애를 반대하기 위한 것인지((<고린도전서> 6장 9절은 <로마서> 1장 26절을 해명하면 자동적으로 해명될 것이라 제외하고) 연구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저자는 역사적 해석 방법으로 이 성서 구절들을 분석한다.(“나는 이 책에서 남성과 남성이 성관계하는 것을 비판하는 성서의 구절들에 대해 문맥과 사회, 역사적 맥락을 최대한 충실히 고려하여 재해석하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 이런 시도를 성서 비평학에서는 ‘역사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면 나는 이 텍스트들에 대한 정치사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성서에서 남자끼리 성관계하는 것에 반대하는 구절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 본문을 해석하고자 했다.”(13쪽) 지면(紙面)이 극히 한정돼 저자의 분석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한다.

1부 “제발 이런 수치스런 일은 마시오.”
―집단 강간 사건의 소거된 목소리[사사기(판관기) 19장 22-23절]


‘둘째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레위인은 기브아에 이르러 한 노인의 집에 묵게 된다. 그러자 성읍의 불량배들이 몰려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

를 좀 해야겠소.”(19:22) 대부분의 번역본 성서들이 ‘관계 맺다’라고 번역하는 희브리어 ‘야다yadah’는 성서에서 ‘성관계를 맺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동성애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문맥상 개연성이 없다. 레위인을 손님으로 환대한 노인은 불량배들을 달래기 위해 레위인 대신 자기 딸과 레위인의 ‘둘째 아내’를 내주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9:24) 만약 불량배들이 동성애자였다면 그런 제안은 결코 협상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그자들은 그 레위인의 ‘둘째 아내’를 밤새도록 성폭행했다(19:25)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 ‘야다’는 성관계를 뜻한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이 구절을 비속어 표현으로는 이렇게 옮길 수 있다고 본다. “저자를 끌어내라. 저 c팔새키를 끌어내라.” ‘c팔’은 ‘성교하다’는 의미의 비속어인 ‘십하다’에서 유래한 욕설이다. 하지만 남자들이 남자에게 이런 욕설을 쓴다고 해서, 그 말을 의미 그대로의 동성 간 성폭력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 ‘야다’의 의미는 그 말이 향하는 대상에게 적개심을 표현하는 욕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아주 독창적인 해석이기는 한데 글쎄?)

2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셨소.”
―‘부끄러운 정욕’의 진짜 의미 (로마서 1장 26-27절)


26절과 27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핵심 단어는 ‘동성애’가 아니라 ‘퓌시코스’다. 이 단어는 ‘순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바울이 ‘그 남자들’과 ‘그들의 여자들’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그이들이 ‘순리’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은 독자들이 두루 공감하는 혼외 성관계 문제를 비판하는 데 ‘순리대로’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순리에 거스른 것’이라고 쓰고 ‘성폭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결코 동성애 반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권력형 성폭행에 대한 비판이다.

3부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
―‘여자와 여자’의 동침은 언급하지 않은 이유 (레위기 20장 13절)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동성애 문제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동성 간의 사랑은 당시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고 심지어 남성 동성애는 권장되는, 이상적인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끼리의 성관계를 절대 금하는, 그리고 여자끼리 성관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텍스트인 <레위기> 20장 13절이 겨누고 있는 실제 과녁은 히에로스 가모스 예배(남신과 여신의 성교를 흉내내는 종교 의식)였다. 그리고 이성애든 동성애든 폭력적 성관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선의 전환을 통한 해석은 이 텍스트를 ‘남성 동성 간의 성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에 관한 것으로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권력형 성폭력의 양상들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도 해석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결국 이 책을 쓴 이유는 위험한 해석에 대한 반박이자 나아가 성서 읽기 공론장이 교회 안팎에서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공론장의 참여자들 각자가 성서 역사가이자 해석자가 되기를 기대한다.”(17쪽) 저자의 제안에 부응할지 말지는 우리의 몫이다.[이 책을 고른 이유: 무지 얇다. 대신: 어려워 또 다른 연구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