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3-29 18:24
[123호] 인권포커스 - 71년 전 제주 4?3항쟁을 뒤돌아보며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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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전 제주 4?3항쟁을 뒤돌아보며

임수필


내가 제주에서 자라면서 어머님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었다. ‘중간 정도만 해라’ ‘나서지 마라’ ‘사람 많은 곳에 붙어라’ ‘살다 보면 살아진다’. 나이가 어릴 때는 그 뜻을 잘 몰라 대충 넘기며 생활했지만 나이가 들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4?3의 아픔을 알고는 어머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를 건너 4?3항쟁과 6?25민족상잔의 시대를 살아 오셨던 어머님으로서는 어찌 되었든 숨을 쉬며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었을 것이다.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숨죽이고 살아왔던 제주민들이였다. 그리고 이제 제주는 침묵의 시대를 현재까지 다 벗어버리지 못하고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고 진실 조명과 함께 평화와 인권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아직도 지역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4?3은 어르신들에게 체험적으로 기억하고 있어 자신이 체험한 테두리 안에서 평가를 하고 있음을 나는 가끔씩 본다. 4.3이후 7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살아있는 분들에게 4?3의 배경과 피해의 실상은 물론이고 당시의 국내외적 정치적 상황을 온전히 인식시키는 데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한 마을, 옆 마을에 살아왔어도 4?3은 70년 동안 쉬쉬하며 누가 선뜻 얘기의 소재로 삼지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죽음과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목도 했던 어르신들은 그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의 가족, 친지, 외가, 마을 주민들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산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전소시킬 때 집을 지키다 돌아가셨다 한다. 반면 나의 장모님의 아버님은 산으로 가셨고 장모님의 어머님과 남동생은 토벌대에 의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육당하셨다고 한다. 어렴풋이 생각났던 남동생의 이름은 70년이 넘어서야 평화공원에 위폐가 세워졌고 처음 본 동생의 이름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두 분이 사시는 곳은 바로 옆 마을이지만 어머님과 장모님에게 4?3은 다른 모습으로 여태 살아가고 계시다. 화해와 치유의 과정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제주 마을마다 어르신들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힘든 과정이 남아있다.

그런데 71년 전 제주 땅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제가 본토 사수를 위해 미군과의 최후 결전을 준비하면서 제주민을 소모품으로 동원하려고 준비하던 차에 일제의 패망은 제주민들에게는 죽음의 압박에서 해방이였다.

그러나 광복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은 곧 무너지기 시작했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경찰의 미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시위 후 구경을 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고 제주도민들은 격분하게 된다.
사건 열흘 뒤인 1947년 3월 10일,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민관합동으로 경찰, 도지사, 공무원 등이 함께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만큼 미군정의 정책은 도민들의 열망과는 다르게 진행되어 분노로 치닫고 있었다.

이 무렵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본토에서 온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을 했고 4?3 직전까지 1년간 2,500명을 구금했다. 이와 같은 제주도의 상황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심각하게 돌아갔다.
미국은 한반도 대다수 민중의 의사와 이익에 반하더라도 남한에서 좌익의 영향력과 민족주의자들을 위축시키거나 배제하면서 한민당을 후원하고 친일파들을 주요 공직에 임명하면서 남한에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단독정부를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민중의 의사에 반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반기를 든 제주도는 탄압에 맞서 나갈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치닫고 있으면서 1948년 4월 3일 ‘단선?단정 반대’, ‘응원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더 이상 악화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대와 군인간의 평화협상도 있었으나 미군정은 토벌위주로 선회했고 무장대는 산으로 올라가면서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5?10 총선거 기간에 도내 각지 투표거부사태가 발생 되었으나 대한민국정부는 수립되었다.

미군정에 이어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과 살육은 거세졌고 해안선에서 5㎞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 초토화 토벌작전 지시가 내려졌다. 이러한 집단학살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3만 여명이 되며 해안가와 중산간 마을을 가리지 않고 방화는 물론이고 참혹하게 집중적으로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이른바 ‘삼진정책(三盡政策)’으로 제주도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하였다. 조사통계에 의하면 이 과정 속에 사망자의 80% 이상이 군경과 우익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러한 광기는 6?25 한국전쟁이 발생 되자 4?3에 연루되어 수감되거나 훈방되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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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사상이 의심스럽다’, ‘경찰과 다투었다,’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총파업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되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공권력에 의한 제주도민 청소 작업과 집단 학살의 광기 속에 신음하던 제주는 1954년 9월 21일. 4?3 발생 6년 6개월 만에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를 폐지함으로써 외면상 평시 체제로 되돌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그러나 그날의 해방은 과연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었던가? 아니면 미군에 의한 한반도 점령, 정복이었는가?

식민제국 일본에서 해방된 이후 일본군의 무장해제, 일제의 악법과 억압적 기구의 혁파, 친일파의 청산을 위해서 점령국인 미국은 정치질서를 혁신했어야 했다. 나아가 한반도 안에서 통일적인 정부가 수립되도록 도와줬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철수 이후에 한반도에서 국가수립 또는 헌법체제를 탄생시키는 과정에 미군은 점령자가 아닌 정복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식민지 나라들을 학살로 정복해 가듯이 남한을 꼭두각시 신식민지로 만들어 가려는 의도에서 군정시기에는 학살을 진행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에는 방조했다.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지역을 관리하고 통치하던 시기, 작은 섬에서 3만이 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미군정이 4?3항쟁에 대한 집단학살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제주 도민들에게 진실규명과 함께 사과와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 임수필 님은 울산시북구의회 의원이며,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