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 경전의 기도문>에 이런 게 있답니다.
내가 생각해야만 하는데도 생각하지 않은 것과
말해야만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
행해야만 하는데도 행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생각한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말한 것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행한 것
그 모든 것들을 용서하소서.
생각과 말과 행위의 삼위일체(三位一體)가 그리스도교[기독교(基督敎)]만 아니라 조로아스터교(배화교, 拜火敎)의 기도문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요즘 정치판을 보면 이런 말씀과는 반대로 가는 게 정치인가 생각하게 되지요?!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야당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라는 게, 사람마다 다 나름대로 정의(定義)를 달리 하겠지만, 적어도 민중(民衆)을 평안하게 하기 위한 장치라는 데는 뜻을 같이 하지 않을까 소망(所望)해 봅니다. 정치가, 말이 너무나 중요하다 보니 공자님은 정명(正名)이란 걸 생각하셨습니다. 논어(論語) 곳곳에 말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두 장면만 소개할게요.
자로가 말하길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맡기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반드시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고 싶다.”자로가 말하길 “여전하시군요, 선생님의 우원(迂遠)하심이란. 어찌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신다고 하는 겁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답답하구나, 유야.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는 법이다.”[공자님이 정명론(正名論)을 펼치게 되는 배경 이야기]
(이어지는 공자님 말씀)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으며,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으며,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맞지 않게 되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군자가 이름을 세우면 반드시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함이 없을 따름이다.(「자로」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안연」편)
그런데도 현실 정치가 이런 본래의 뜻과는 엇박자로 흐르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 탓일까요, 저희가 감시를 게을리해서일까요? 여하간 현실 정치가 요 모양 요 꼴로 굴러가는 건 저희 잘못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항하지 못한 잘못. 스테판 에셀은 팜플렛 《분노하라》에서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과연 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실천하고 있을까요?]
지금 <채상병 특검법>이 논란(論難)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법 자체에 관한 논란이 아니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논란입니다. 2년 임기에 열 번의 거부권 행사라?! 가히 제왕(帝王)입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엄청난 횟수의 거부권 행사 기록 보유자인데 이 양반이야 자신이 왕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윤 대통령은 법조인 출신의 대통령인데도 이 모양이군요. 거부권을 한 번도 행사하지 못한 전직 대통령들로서는 탄식을 금(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민주주의의 한 요소가 삼권분립(三權分立)이라고 볼 때 가히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인 셈이구요. 윤 모 대통령이 생각이 없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누구나(심지어 여당 사람들이나 청와대 참모들까지도) 공감하는 바일 텐데 이런 행태를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는 건 민주주의의 한계인가요,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하는 저희들 책임인가요? 성경 말씀대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이런 말씀이 있어 우리가 위안을 받습니다.(이런 말씀이라도 붙잡고 있어야겠지요.)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렌터 윌슨 스미스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울산인권운동연대 인권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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