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6-27 17:30
[126호] 시선 셋 - 제10회 인권평화기행. 상해, 남경으로 떠나는 다크투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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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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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인권평화기행 - 상해, 남경으로 떠나는 다크투어 ②
정성훈
안녕하세요. 저는 충남 금산에 위치한 금산간디고등학교에 재학중인 3학년 정성훈이라고 합니다.
저는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대안학교는 정해진 틀에서 짜여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닌 학생들이 직접 틀을 짜고 그 틀에 맞는 규칙을 세우고 습득하는 방식의 교육을 합니다. 저는 이런 교육방식이 마음에 들어 이 학교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안학교의 시간을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경험과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여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기대했지만, 3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진정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모습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시간을 소비하지 말자’는 저만의 작은 철학이 있었는데 되돌아보니 저는 이때까지 저 자신만을 위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자괴감이 들어 지금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아버지가 저에게 인권평화기행을 같이 가길 추천하셨고, 저는 이 여행을 통하여 ‘타인의 삶도 바라보며 함께 공존하고 서로 의지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번 인권기행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둘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 더 설레기도 하였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런 경험을 통하여 저는 내면의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나의 성장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월 30일 김해공항에서 출발하여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하고,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상해임시정부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설립되어 독립투사들의 애환과 애국정신이 서린 곳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 내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청사이자,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한 곳입니다. 지금도 상하이 도심의 뒷골목에 보존되어 있으며, 2015년 9월에 재개관하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처음 가본 것은 아니었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의 색깔은 늘 달랐습니다. 어쩔 땐 슬펐다가, 또 어쩔 때는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앞에서 아버지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버지와 둘이 찍은 사진을 보니 아버지께서는 너무나도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왠지 아버지께 제대로 효도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뜻깊은 추억을 남기고, 우리는 신천지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중국 음식들은 대체로 기름져서 제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한국 음식을 찾는 것은 더욱더 여행을 간 본질을 흐려버리는 행동이기에 맛있게 잘 먹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기념관에서 보았던 윤봉길 의사의 흔적들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아 나를 괴롭혔습니다. 25살이라는 청춘이, 붉게 빛나는 나이에 순국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상상으로도 버거운 마음가짐으로 그 시대의 험난한 삶을 사셨다는 게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느낄 때마다 중국에 온 것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937년 12월 19일 상하이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하였습니다. 불과 6주 만에 3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바로 ‘난징대학살’입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300,000이란 숫자가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30만이라는 사람들이 무참히 아무 이유 없이 죽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들이었고, 이제 와서 그때의 일본군을 욕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용히 간절한 마음으로 묵묵히 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기념관 모퉁이에서 12초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것은 대학살이 벌어진 6주간 30만 명이 12초마다 한 명씩 죽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상을 해보기엔 저 자신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될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위안부 박물관으로 향하였습니다. 위안부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임신한 소녀 모습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동상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위안부 박물관을 관람하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위로해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 같이 욕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양심에 걸려 그저 묵묵히 진심으로 괜찮다고, 이제는 편히 쉬어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낀다는 것은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배움으로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배움조차도 저의 지식으로 가져가고 싶었는데 아직은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아픔이고 배움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우리는 황포강 유람선을 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타 본 유람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하는 유람선이었습니다. 유람선이 지나갈 때 초고층 빌딩들이 빛을 내며 밤길을 밝혀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야경을 보러 온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발 디딜 공간조차 확보하기 힘들었던 게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그때의 순간은 저에게 중국에 대한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다시 한 번 꼭 가고 싶은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음 날 상해 푸동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돌아왔습니다.
3박 4일이라는 긴 시간이었지만,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했고, 소중한 만큼 시간도 빨리 흘러갔기에 저에게는 당일치기한 기분이었습니다. 중국을 가기 전에는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다녀오자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지켜내지 못하였습니다. 김해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아 그때 그거 먹어볼걸.. 그때 그것도 해볼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련도 그만큼 좋은 추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란 생각에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한 중국여행. 아버지라 더 행복했고, 더 낭만적이었습니다. 중국여행을 마치니 앞으로 아버지와 함께 더 많은 것들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번 중국여행을 통하여 배운 것은 저의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 그리고 경험을 통해 얻어가는 지식이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고, 아직도 그때의 여운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중국여행을 통한 저의 모습에 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을 가기 전의 나와, 다녀와서의 나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시간만 가득했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하루를 채웠던 그 순간들은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그때의 기억들은 저에게 손길을 내밀어 줄 것입니다.
※ 정성훈 님은 정한경 회원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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