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0-01 17:47
[117호] 인권포커스 - 낙태죄 폐지 찬성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6,596  

낙태죄 유감

주응식



2009년 11월 1일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의 모임인 자칭 '진정으로 산부인과 의사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진오비)'라는 단체가 의협회관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모임의 대변인이었던 최안나 씨는 성명을 통해 낙태 근절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약속하며 '내부적인 갈등과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하면서 뜻있는 의사들이 용기를 냈다'며 '의사들만의 외침으로 끝나지 말고 범국민 운동으로 이어져 낙태 천국의 오명을 씻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 지지 않을 경우 2010년 1월 1일부터 낙태하는 병원의 동료의사를 직접 고발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2010년 2월 그들은 3명의 동료 의사를 낙태죄 위반의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 고발했다.

파장은 컸다. 안 그래도 죄인 취급받는 시술을 이참에 같이 하지말자는 의사들과 고발이 두려워 시술을 하지 않는 의사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모두 낙태를 중단했다. 현행법상 낙태는 성폭행, 근친상간, 유전적 이상이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형법 269조는 낙태를 의뢰한 여성에게 징역 1년 이하 혹은 2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낙태를 시행한 의사에게 징역 2년 이하의 형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형의 집행에 관계없이 보건법령에 의해 의사는 1개월간 면허를 정지 당한다. 낙태가 필요한 여성들은 절박했다. 인터넷에 낙태가 필요한 여성들을 중국으로 실어 나르는 브로커들이 돌아다녔고 3박 4일 중국 원정 낙태비용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그럴 수도 없는 사람들은 낙태를 위해 병원을 전전하며 시술을 구걸하고 다녔다.

2010년의, 어느 비까지 오던 오후였다. 다짜고짜 접수도 않고 진료실 문을 열고 중년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리고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직감은 맞았다. 따로 가정이 있는 은행원과 가정주부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둘 다 창백한 얼굴이었으며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절박해 보였다. 나는 졸지에 신이라도 된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들은 그 전날 경주시내와 그 인근의 모든 산부인과를 돌아다녔다고 했고 하루를 더 보낸 다음 아침부터 울산의 산부인과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신문지에 싼 두툼한 지폐다발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나는 받을 수 없었다.

삼십분 여를 설득한 다음 남자의 절망적인 눈망울을 외면하며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끝이 그나마 안도의 상황으로 끝났을지, 아니면 파국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 시기에 수많은 환자들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와 읍소하였지만 그 사연들을 절절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현장에서 내가 내렸던 결론만큼은 분명하다. 우린 그 누구도 신의 자리에 서서 인간을 단죄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우리를 법의 형태로 단죄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지금도 법의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윤리의 영역과 법의 영역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나쁘지만 어쩔 수 없는 무언가는 불완전한 인간사에 무수히 많다. 착각하지 말자. 인간은 완전체가 아니다. 근대에 들어 수많은 제도들이 인간은 거의 이성적이고 대부분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인간은 스스로를 부조리하고 오류투성이인 존재로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형태로 ‘낙태가 죄라는 관념’은 그런 '무오류의 인간' 을 설정하여 실정법에 명시되었고, 생명존중이라는 (근대적인 휴머니즘과 남성중심주의 시각을 내의로 입고 외투로는 종교적인 윤리강령을 걸친) 두터운 옷을 걸친 후 정당성은 더더욱 공고해졌다. 그래서 그러므로, 당연하게 그런 이상이나 관념에 의거한 법은 현실과의 괴리를 결코 줄이지 못한다.
그 관념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한 가지는, 지금은 폐지된 간통죄도 처벌은 남녀 쌍방이 받는데, 낙태죄의 경우는 범죄의 원인 행위자는 남녀 두 명인데 처벌은 부녀자(여자)만 받는다. 강도에 비유하자면 돈을 훔친 자는 처벌을 받지만 같이 계획하고 망을 본 자는 처벌대상이 아닌 것이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대부분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럼, 낙태가 허용되면 우리 씨를, 여자들이, 함부로, 그건 절대 안 돼지. 안되고말고.' 라는 이야기다. 남성의 종족본능욕은 말 그대로 본능적이다. 그것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우리는 판단이나 결정을 이성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한다고 착각하지만, 판단이나 결정은 대부분 무의식이 하고 의식은 그 결정들을 지지하고 보충하는 논리들을 덧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의심되는 낙태반대론의 가장 큰 이유는 남성들의 멸족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무의식의 반영이 집단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법의 제정자는 거의 남성이니까. 그리고 그런 남성 중심적인 사유를 고스란히 내면화 한 여성들도 동참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금지를 충실히 지키고자 하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금지를 위배한다고 모두 현행법 위반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낙태 문제는 바로 젠더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포덩어리 상태의 태아의 생명권이 중요하다면, 왜 임신의 당사자인 여성의 생존권은 중요하게 존중받지 못하는가. 이 지점에 시선을 머물러 보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적어도 육아를 사회가, 혹은 남성이 전적으로 책임져 줄 수 없고, 현실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현실을 직시하자. 그리고도 낙태를 선택한 여성을 법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도 애매하다면 얼마 전 (심지어)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언급했던 롤스의 '무지의 장막'을 적용시켜보자. 방법은 이렇다. 나는 장막을 친다. 그리고 낙태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 그런데 나는 장막을 치는 순간 나의 지식과 이성은 사라지지 않지만 나의 나이, 성별, 조건, 계층 등 나의 사회적인 조건들은 모두 잊는다. 좀 더 설명하자면 나는 남자일수도 있지만 여성일 수도 있고 가임기 일 수도 있다. 혹은 재수 없이 한 번의 불장난으로 임신한 고등학생이거나 그 부모일 수 있고, 중년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혹은 그 상대남인 경우일 수도 있고, 박봉의 남편을 둔 아이 셋에 생활에 치여 우울증까지 앓고 있는, 그리고 며칠 전 임신을 알게 된 경력 단절녀 일수도 있고, 결혼을 앞두고 상대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는 사기꾼임을 알게 된 절망에 빠진 약혼녀 이거나 그 부모일 수도 있다. 나는 낙태죄에 대한 결정을 한 후에 장막을 걷고 나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지 않았냐고?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진료실에 앉아보라. 이런 경우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를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잣대를 가지고 어떻게 윤리적으로 비난을 하던지 관계없다. 그러나 당신은 정말 장막의 무지를 전제하고 낙태죄는 유지 되어야 한다고 법률안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

※ 주응식 님은 하나산부인과 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