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4-27 16:58
[112호] 인권포커스 -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아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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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아

이강민



제주 4.3 항쟁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비정상적인 위정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인 색깔에 덧칠해진 사건의 개요와 진실은 현재까지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사건 발발 70돌을 맞았다.
현기양 선생의 소설 “순이 삼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사실 만큼이라도 알려졌을까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과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순이 삼촌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해소 되면 좋겠지만 순이 삼촌이 죽은 지 30년이 지나도 4?3은 그 죽음이 유예된 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 유예된 죽음이 어디 순이 삼촌뿐이겠는가. 4?3평화공원 전시관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백비(白砒)에도 유예된 죽음이 있고, 묘비에 이름이 없는 ‘아무개의 아들’에게도 죽음은 아직 유예되어 있다. 또 아직도 4?3의 희생자에 이름을 넣지 못하고 숨어 지내는 분들에게도 있고, 제주공항에 묻혀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유가족에게도 죽음은 유예되고 있다. 그래서 4?3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4?3항쟁의 명예를 반드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4?3항쟁의 발발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억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관련자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 지난 2003년 故노무현대통령은 국가수장으로서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4?3항쟁 당시 제주도민들의 구호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그것은 첫째, ‘통일정부수립’ 둘째는 ‘친일모리배 청산’ 셋째는 ‘양과자 먹지말자’이다. 여기에 호명된 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즉 분단을 획책한 자, 친일한 자, 그리고 미국이다. 제주민예총에서는 간곡하게 호소한다. 그리고는 제주민예총은 4?3항쟁 7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반드시 미국의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4?3의 원인이 폭도들이였든, 경찰의 과잉진압이었든, 혹은 소련봉쇄를 위한 미국의 의도였든, 4?3의 결과는 30만 제주도민 중에 3만 여명(이중에 무장대는 500명도 되지 않았다)이 학살당했고, 그 아픔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한국 군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친일경찰과 해방된 조선의 모든 정책을 관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뿐이었기 때문에, 4?3은 미군정의 치하에서 벌어졌고 그 책임 또한 명백하다.

그럼에도 4?3항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아직도 주한미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사드배치와 군사훈련 강행 등 한반도에서 위험천만한 전쟁소동을 벌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친일파는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우리는 4?3항쟁의 일지를 통해 미군이 우리의 통일과 우리 민족의 자치(自治)를 막기 위해 친일경찰과 친일정치인들을 그대로 활용했음을 확인했다.

북미간의 핵 대결이 심화되는 오늘날, 그 빌미로 한반도 평화의 섬 제주에 또다시 미군의 핵잠수함이 제집 드나들 듯 하는 현실을 묵과 한다면 4?3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또 다시 어느 땅이 레드 아일랜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역사에서 4?3항쟁이 4?3사건으로 기억되는 한,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죽음은 풀길이 없어진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동안 4?3위원회는 회의조차 제대로 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희생자 자격에 대해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망발을 늘어놓는, 그야말로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4?3의 아픈 기억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전변시켜, 희생자들의 수고에 후세들이 감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4?3의 진실을 더 많이 알리고, 완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제주 4?3의 상처는 통일이 되어야만 아문다”라는 유족들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십어야 한다.

관덕정에서 처음 본 가이드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녀는 “4?3항쟁 70주년이 되는 올해는 너무나 중요한 해”라고 했다. 4?3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시는 분이 당시 10살이었다 해도 지금은 팔순이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하다.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는 추념 시]

비설(飛雪) _ 이강민


미군정과 이승만은 무장대 토벌을 위해
해안에서 5km이상 떨어진 한라산 중산간 이상지대의 모든 사람에게
사살명령을 내렸다.

칼바람눈보라 속에서도
악착같은 토벌대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피하다 결국...
총을 맞고, 눈 속에 파묻혀버린
모녀(母女).

차라리
눈 속에서 따뜻했다.

토벌대를 피해
죽어라고 뛰지 않아도 되고...
아니 토벌대를 피할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아! 어찌 몰랐던가?

지옥이 하늘에 있지 앉고
땅에 있었음을...


2015. 1. 17. 4?3 평화공원에서


※ 본 글은 사)울산민예총 발간잡지 ‘커뮤니티 아트 in 울산’(2017-2)에
게재된 글을 글쓴이의 허락 하에 줄여서 작성되었으며, 현 시기 급속도로
진전이 있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강민 님은 울산민예총 정책위원장이며, 4?3항쟁 70주년 울산준비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