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1-01 21:29
[130호] 여는 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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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이선이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일기를 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스로 원해서 일기를 써본 적이 없는 아이라서 담임선생님의 지침에 따라 일기를 쓰는 횟수가 정해진다. 올해 담임선생님은 일기를 쓰는 횟수와 함께 내용도 정해주셨는데, 일주일에 두 번을 쓰되 한 번은 생활일기, 한번은 주제일기를 쓰는 것이다. 선생님이 학기가 시작될 때 스무 가지 정도 주제를 미리 정해주셨는데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그에 맞게 일기를 쓰는 것이 주제일기이다.

아이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끔 아이의 일기를 본다. 굳이 엄마에게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간식을 안 주는 것은 아동학대라고 생각하지만 일기를 보는 것은 괘념치 않는 아이라서, 재미삼아 일기장을 들춘다.

얼마 전 아이가 선택한 주제일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제목을 보고 일기를 읽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프레데릭’이라는 말이다.” 응? 프레데릭?? 이게 뭔가 싶어서 어리둥절하다. 또 출처불명의 유튜브에서 이상한 말을 주워들었구나 싶어서 계속 읽어나간다. “이 말은 홀스타인 품종으로, 아름다운 갈기와 윤기 나는 털을 가지고 있다.” 그제야 내 뒷머리를 치고 올라오는 깨달음. 어이구 이 녀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다그닥 다그닥 달리는 ‘말’로 이해한 것이다. 한참을 웃다가 아들 녀석에게 이 말은 그 말이 아니라고, ‘말할 때의 말’이라고 했더니, 본인도 깜짝 놀란다. 그 생각을 전혀 못했다고,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뭔지 몰라서(모를 수밖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馬이 뭔지는 나도 모른다.) 인터넷에 검색까지 해봤다고.

그 뒤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함께 웃었다. 감성적인 접근이라고는 1도 없는 아이의 단순함이 너무 우스웠고, 구글링을 해보니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프레데릭’이 나와서 황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프레데릭 말고,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言은 뭘까.

생활인으로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은 가족, 돌봄, 사랑 이런 말이고, 노무사로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은 노동, 권리, 정의 이런 말이고, 인권운동연대 회원으로서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은 인권, 가치, 존엄 이런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 모든 말보다, 그 외에 어떤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차라리 침묵이 아닌가 싶다. 너무 많은 말이 사실인양 쏟아지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진실인양 넘쳐난다. ‘말이 칼이 되니’ 말 때문에 사람이 바스러진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가족은 인생 전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어 저잣거리에 내걸렸고, 설리는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놓아 버렸다. 차라리 침묵하였다면, 응원하고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혐오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골라내기 전에, 말 같지도 않은 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랍시고 쏟아내는 저 입들을 닥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우리 아들의 일기장을 들추는 것만큼이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인권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요즘 세상은 입은 너무 가볍고, 그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너무 많고 무겁다. 그동안 내 입은 너무 가볍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프레데릭’은 적어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지는 않을테니, 어찌 되었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은 틀림이 없겠다. 아들 말이 맞네. 비웃어서 미안하구나.


※ 이선이 님은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