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습지
이혜경 저 / 현대문학 2019 / 정리 김창원
< 내용 >
“기억의 습지”에는 가해의 얼굴을 특정할 수 없는 역사라는 괴물이 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그’(필성)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베트남전에 차출되고, 도착 사흘째 첫 전투에서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방 병장의 죽음을 마주한다. 이 끔찍한 죽음의 기억은 평생 떨칠 수 없는 악몽이 된다.
‘그’에 앞서 베트남전에 투입된 청룡부대는 퐁니라는 마을에서 주민들을 학살한다. 응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버지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다리에 총을 맞아 평생을 절뚝여야 했다. 응웬의 아버지는 늘 악몽을 꾸었고, 그 악몽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엄마를 구박했다. ‘응웬’이 한국의 시골로 시집을 오게 된 가난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시신을 목격한 ‘그’는 전쟁 자체가 공포이다. 베트남 파병을 체념하며 받아들인 이유는 가족의 가난이었다. 동생 필주의 대학등록금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
“기억의 습지”에는 또 한 명의 독거노인 ‘김’이 등장한다. 그는 북파공작원 출신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항공기 공습으로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로 자란 그는 서울로 상경하는 날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북파공작원 훈련소에 들어간다. 그는 나라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었다.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김’이 저지르는 충격적인 사건과 마주한다. 범죄 이후 산으로 가면서 ‘김’은 ‘이건 보복이야. 외국인인 그녀를 받아들인 나라, 정작 그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친 자기를, 자기들을 내친 나라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필성과 김에게 악몽으로 출현하는 기억의 습지이다. 필성과 응웬을 우연의 오해 속에 방치하는 무심함이며, 응웬에 대한 김의 잔혹한 범죄 자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사건으로 드러난 현상에서 머물러 있기 일쑤다. 역사 속으로 들어서게 되면 가해/피해의 구도를 그려내기가 너무 어렵다. 때론 그 경계 자체가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역사를 실체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습지’에서 그(필성), 김, 응웬의 삶을 ‘역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삶 속에서 역사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많은 이들이 역사로부터 피해를 입으면서 역사로부터 소외된다.
새댁의 엄마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내장이 다 쏟아지는 듯 한 비통함이 차 안을 적셨다. 이장의 옆에 앉은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보온병에 담아간 따뜻한 보리차를 건넬 뿐이었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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