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6-27 18:00
[126호] 여는 글 - 옹호자가 된다는 것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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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자가 된다는 것

이선이


며칠 전 저녁, 아는 분의 부탁으로 전화 상담을 했다. 그분의 제자인데, 회사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아주 앳된 목소리였다. 1년 반 전에 계약직으로 입사를 했는데, 다른 동기들은 1년이 지나고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는데 자신만 안 된다고 했다. 인사팀에서는 상급자의 추천서가 있으면 바로 전환이 된다고 하는데, 그 상급자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추천을 미루면서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다른 동료들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로 모욕감을 주고, 너가 하는 걸 봐서 정규직 전환을 시켜주겠다는 식으로 갑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회사에 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얼마 전에 만난 40대 여성노동자도 비슷한 괴롭힘을 겪고 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5년 가까이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되었는데,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니 특정 상급자의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 부서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명예훼손의 여지가 다분한 의혹을 제기하고, 업무 배당에 불이익을 주고, 마침내는 일자리도 잃게 만들었다. 그분도 역시 내 앞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이 분은 40대 남성노동자이다. 울산에 있는 탄탄한 중소기업에서 사무직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리해고를 당했다. 정리해고 대상자는 그분이 유일했다. 500명이 넘는 큰 회사에서 사무직 과장 1명이 정리해고를 당했다니, 언뜻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노동위원회에서도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정리해고의 이면에도 역시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 업무분장 문제로 상급자의 눈 밖에 나면서 사직을 강요당하기 시작했고, 거절하니 책상을 문 앞으로 뺐다. 어떠한 업무도 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게만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분이 사직을 하지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정리해고였던 것이다.
이뿐인가. 사회복지시설에서 근무하던 한 여성노동자는 시설 이용자들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도너츠를 제공하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했다가 집단 왕따의 희생자가 되었다. 입사할 때 정했던 업무가 아니라 다른 업무를 시키고,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에 책상을 두고, 있지도 않은 일을 트집 잡으며 경위서를 내라, 시말서를 내라 강요하다가 결국 해고까지 하였다.

이쯤 되면, 사용자들끼리 따로 모여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교육이라도 받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한(소위 인사권, 노무지휘권, 징계권)을 도깨비방망이처럼 휘두르며 노동자에게 모욕감을 주고,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그와 그 가족의 생계까지 마구 주무를 수 있는지.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한 인간을 부수어버릴 수 있는지.

그동안 사용자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인사발령이나 징계, 해고와 같은 인사처분)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 마땅한 법적 규제가 없었던 탓도 크다. 권력을 이용한 괴롭힘, 일명 ‘힘 희롱’에 대해서 규율하는 법이 없으니, 피해를 당한 노동자들도 이를 호소할 데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여 7월 16일부터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규제가 시행된다. ‘직장에서의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즉시 이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호조치와 가해자에 대한 징계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강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사용자가 이런 조치를 안 한다면? 아니, 만약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라면? 이에 대한 대안은 없는 상태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하여 여러 상담을 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그 노동자의 옆에 단 한 명이라도 그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직장 내 옹호자’가 있다면, 이 노동자는 그 힘으로 버틴다. 그 힘으로 해결책을 찾고, 싸울 힘을 얻는다. 앞에서 본 사례도 비슷하다. 앳된 여성 노동자의 옆에는 “정규직 전환 안 되면 나도 그만두겠다.”면서 상급자의 불합리한 처사에 같이 항의해주는 노동자가 있었고,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의 옆에도 회사 규정을 일일이 확인하며 부당한 점을 지적해 준 동료가 있었다. 정리해고된 남성 노동자의 옆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복직을 응원해 준 동료가 있었고, 사회복지시설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옆에도 상급자의 눈치를 살피며 몰래몰래 파이팅을 주고받는 동료와 이용자가 있었다.

이것이 ‘옹호자’의 힘이다. 직장 내 괴롭힘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 그대로‘ 병들게’ 하는 것이다. 괴롭힘을 하는 사람은 한 명이어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결국 가해자이다. 이럴 때 단 한 명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힘을 얻는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 더욱 강한 것이 바로 ‘직장 내 옹호자’의 힘인 것이다. 인권운동연대 회원들이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그러한 마음을 내줄 것이라 믿는다.

※ 이선이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