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6-27 17:36
[126호] 시선 둘 - 제10회 인권평화기행. 상해, 남경으로 떠나는 다크투어 ①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5,978  

제10회 인권평화기행. 상해, 남경으로 떠나는 다크투어 ①

김윤경


출발 전부터 몸이 썩 좋지 않았다. 기침, 몸살 등으로 며칠 동안 계속 병원 신세였으며, 빠져볼까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대표님이 보내 준 문자가 떠올랐다.
“특히, 단체 비자의 성격상 한 명이라도 빠지면 인권평화기행 자체가 취소됩니다.....”
괜히 간다고 했나? 일정을 보니 재미도 없을 텐데, 차라리 그 돈으로 딴 데 가서 쉬다 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사표를 던지고 나와서 간다는 곳이 다크투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모든 잡생각과 고민을 떨치고 나는 3박 4일간의 평화기행을 무사히 마쳤고, 지금 다시 그 날을 돌아보고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뤼신공원 그곳에 윤봉길 기념관이 있다. 이 큰 공원에서 중국왕도 아닌 일왕의 환영식이 열렸고, 젊은 윤봉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중국도 못한 일을 작은 나라의 청년이 해낸 것에 중국은 감사했고, 그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의 업적에 대해 소개한다.

현재 상하이에서 가장 세련된 쇼핑 장소이며, 많은 레스토랑과 술집, 바(bar), 커피숍, 테라스 카페, 상점, 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고, 예술가들의 아트숍도 자리하고 있는 신천지. 그 화려한 도로 하나 사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발견했다. 좁은 집무실과 계단을 따라 3층에 다다라서 내다본 창밖 풍경은 빨래가 즐비한 건너편 집에서 누군가 나를 감시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이 몰려왔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 임시정부 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모였을까?
백 년 전 김구 선생도 내가 잡은 난간을 잡고 이렇게 아래층으로 내려갔었겠구나 생각했다. 낡고 삐걱거리는 계단소리와 건너편의 화려한 신천지가 묘하게 어울려 있는 곳이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비인간적인 비극의 역사,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기념관이 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 범죄로,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벌인 가장 끔찍한 만행으로 꼽힌다. 중국 측 통계에 따르면 40일 사이에 30만 명의 중국인이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시체와 시체가 쌓이고 쌓인 그래서 그대로 층이 되어버린 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입구에 들어서면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조형물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마치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 꼼꼼히도 잘 모아 놓았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곳곳에 보인다. 눈을 돌릴 때마다 보이는 [희생자 300,000]이라는 문구들. 6세 정도 되는 아이의 유골, 어느 나이 많은 여자의 유골, 아기의 유골... 설명된 그곳은 마치 고대 유물 발굴현장이었다. 그들 위에 서 있는 것이 상당히 미안했지만, 그들의 희생을 밟은 내가 할 일은 그들을 기억해 주는 것인 것 같아 더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만삭의 어린 소녀가 슬픈 얼굴로 발끝을 쳐다보고 있다. 중국으로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였다. 꽃 같던 그녀는 상상도 못 할 일을 당하고 살아남아 다시 이 지옥 같은 곳을 찾아왔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지만,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하여 일본의 만행을 증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난징위안부 기념관에서 만난 그녀는 울고 있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일정표를 받아 들고부터 뭔가 어두울 거라는 생각은 했다. 즐겁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라고 하니 임시정부청사 정도는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설렘만 가지고 출발한 기행이었다. 그 막연했던 설렘은 아픔으로 치환되어 전쟁과 일본에 핍박받던 나라의 공통된 주제가 필터링 없이 그대로 가슴에 콕콕 박혔다. 참 아픈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난징대학살 전시관 끝에 ‘?史可以?恕 但不可以忘却. 前事不忘 后是之師’ 즉,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슬픔을 겪고, 서로 다른 혹은 비슷한 방법으로 앞으로 나가는 법을 배워왔다.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님이, 학살당한 많은 사람들과 꽃다운 소녀들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전쟁이 비참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위안부의 현실이 낯부끄럽고 알리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맞닥뜨려야 할 이유가 있다면 강하게 서야 한다고. 생채기를 통해 단단해지는 살처럼, 아픔이 필요하다면 아픔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되새김질 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기침이 잦다. 다녀와서 쎈 몸살을 겪었다. 그래도 뚜렷하게 남는 생각은 [잘 다녀왔다] [잘했다] [좋은 경험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난징에서 중국의 과거를 경험했고, 상하이에서 중국의 미래를 경험했다. 화려한 신천지 건너편의 초라한 임시정부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두 경험이었지만, 그 속에서 묘한 공감대를 얻었다. 그 공감대와 함께 이번 몸살이 내 지식을 더 단단하게 해줄 생채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김윤경 님은 제10회 인권평화기행 참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