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
김준형
비행기에서 내린 뒤, 처음 보게 된 공항의 풍경은 꽤나 낯선 모습이었으면서 프랑스에서만 지내며 다소 가볍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받아들였던 나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공무원분들은 모두 영화에서나 보던 방역복을 입고 해외입국자들을 하나하나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었고, 위치추적을 위한 자가 격리용 애플리케이션의 설치가 의무화 되어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한국정부가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야기된 팬데믹 상황을 국가적으로 얼마나 강력하게 통제하려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울산으로 KTX를 타고 이동할 때도 해외입국자들은 일반승객들하고 분리된 상태로 움직여야했다. 격리상태로 도착했음에도 역시 오랜만에 온 고향은 친숙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광명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승객들하고는 격리된 통로로 울산역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됐다. 무려 휴가를 2일이나 쓰시면서 나를 데리러 오신 아버지를 나는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로 알아보지 못했다. 참 불효자가 따로 없다.
아버지의 차에 탄 후 점심을 구입하고 일단은 가족들이 머무는 자택으로 향했다. 보건소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오후 4시가 되어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콧구멍이 뚫릴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아버지와 함께 격리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청소해주신 가족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고층의 격리장소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짐 정리가 끝난 후, 담당공무원께서 울산시에서 자가 격리자들에게 보내주는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도착하셨다. 담당관분이 짐이 무거워 도움을 부탁하셨기에 나와 아버지는 둘 다 격리장소에서 내려갔을 때, 그분이 내가 자가 격리자라는 걸 확인하자 한 마디를 하셨다. “이러면 고발당합니다.” 반성과 함께 다시 격리장소로 올라가 자가 격리수칙을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공무원분이 돌아가고 나서 아버지와 함께 보급품을 열어보았다. 빽빽하게 채워진 식품들을 바라보며 나는 현 정부와 송철호 울산시장님께 충성(?)을 맹세했다. 아버지까지 집으로 돌아가시고 혼자서 저녁을 해결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나의 자가 격리 첫날이 끝났다.
아침 9시에 일어나자마자 시끄러운 알람과 함께 시청에서 지급된 온도계를 이용해서 체온을 잰 뒤 자가 격리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나의 몸 상태를 전달했다. 정기적으로 고열(37.5도 이상), 인후통, 어지럼증, 콧물에 대해서 보고하게 되어있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아버지가 나의 검사결과가 음성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 주셨다.
2주 동안의 자가 격리는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치열한 싸움은 아니었고, 유튜브와 넷플릭스, 그리고 부모님이 전달해주신 책들 덕분에 시간을 쉽게 보낼 수 있었다. 또, 건강을 위해서 했던 홈 트레이닝과 정기적인 방청소를 하면서 한 두 시간 정도는 알차게 땀 흘리며 채웠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식사였다.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다보니 보급품들이 금방 떨어졌고, 일주일이 지나고서는 나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어머니에게 꽤 큰 고민이 됐다. 다시 한 번 고생하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그런 노고덕분에 보급품이 없어도 식사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다.
자가 격리가 해제되었던 시간은 14일이 지난 후 낮 12시였다. 내 경우에는 문자가 아니라 담당공무원께서 직접 전화를 해서 알려주었다. 자가 격리가 끝난 후 내가 무언가를 크게 느낀 것은 없었다. 격리가 되었지만 세상과 단절된 것도 아니었고, 내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커다란 해방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내 개인적인 시간인 2주가 자가 격리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아쉬움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 치열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던 내 격리기간의 마지막은 주변 동네 PC방에서 3시간 동안 게임을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 김준형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김창원 운영위원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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