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놀라거나 무서워한다
박금산 저 / 도서출판 b, 2020 / 정리 : 오문완
이 책은 <제국의 위안부>를 소재로 페미니즘을 배워가는 어느 대학교수/소설가의 성장(?)소설이다.
첫 장면이 재미있다. 교훈도 준다. 나야 페이스북을 하지 않으니 괜찮겠지만, 이 책(페이스북)에 재미들이신 분들은 조심하시라! 좋아요, 함부로 누르지 마시라! 판단은 진중히 하시라!
시작은 좋았다.
“교수는 페이스북에 새 소식으로 올라온 글을 바라보았다. 어떤 저자가 형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고소를 당하고 2년 넘는 시간이 지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니 그간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변호사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저자의 고통에 공감했다. 얼마나 소모적이고 미개한 일인가. 저자와 모르는 관계지만 축하를 보내고 싶었다. 친구의 타임라인에 링크가 걸린 글이었다. 교수는 내용을 꼼꼼히 읽기 전에 ‘좋아요’를 누른 후 자신도 친구의 포스팅에 링크를 걸었다. 얼핏 보니 음란성이거나 표절 같은 법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축하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링크 정도는 걸어줘야 자기 마음이 표현된다고 생각했다.”(7-8쪽)
그러나 그 “좋아요”가 비수가 되어 다가온다.
“교수는 심심풀이 삼아서 기사를 천천히 읽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의 마음과 가까이 다가가 읽을 때의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교수는 왠지 그물망에 걸려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아요’를 누른 것이 후회되었다. 재판에서 쟁점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일본군 ‘위안부’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였다. 함부로 다가갈 성질이 아니었다. 교수는 마음에 위축이 들었다. 평소에 믿을 만한 글을 쓰는 친구가 관심글로 링크를 걸었기에 일단 ‘좋아요’를 눌렀는데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8쪽)
교수는 사태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판단에 도서관에서 문제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좋아요’를 누른 것을 후회한다. 책의 논지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쾌감과 메스꺼움, 분노로 잠을 설친 그는 누군가와 그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제자 혜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이튿날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독후감에 동조해 주리라 기대했던 혜린은 오히려 까칠하기만 하고, 급기야 헤어진 뒤에는 그러다 ‘한남충’ 된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다.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단과대학 성평등센터 관계자인 동료 교수가 자신에게 들어온 제보라며 보여준 페이스북 글에서 혜린은 자신과 만났던 일을 두고 “권력자” “폭력” “성적으로 대상화된 경험” 운운하며 “한 번만 더 그러면 고소할 것”이라고 밝혀 놓지 않았겠는가.
남자 교수가 졸업한 여자 제자에게 야밤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비록 책에 나온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강간”이니 “매춘”이니 하는 용어를 입에 올린 것부터가 문제였다. 게다가 교수가 취직자리라도 소개해줄 줄 알고 나갔던 자리에서 엉뚱하게 책에 관한 이야기만, 그것도 “성담론을 지식상품으로 소비하는 남성의 우월의식에 빠져” 늘어놓는 바람에 혜린의 분노가 폭발한 것.
이제는 반성의 시간으로.
“교수는 포스팅을 올린 혜린이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강간적 매춘이라니, 도대체 이게 뭐니? 남자 교수가 여자인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면? 죽여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피해자의 입장에서 분노한 적이 있는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분노하는 것이 진짜라고 말하던 혜린이의 얼굴이 스쳤다. 성담론을 소비하는 남성의 입장에서 ‘위안부’ 책을 읽었다는, 혜린이의 문장이, 그의 가슴을 치고 갔다. 잘해주려면 허락을 받고 잘해주어야 한다는 성평등센터 위원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57쪽)
그런데 학과 사무실에 우편물을 확인하러 들어갔다가 발신자가 ‘제국의 위안부’인 편지를 본다. 그 내용은?
“넌 한 번도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다. 그들을 관조의 대상, 사색의 대상으로 생각은 했지만 그들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만약 당신이 한 번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다면 희생이라는 가증스런 단어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생각해봐라. 네가 혀를 잘렸는데 그걸 두고 ‘나는 희생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네가 생식기를 절단 당했는데 너 자신을 희생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 너를 정교하게 계획해서 린치를 가한 후 트라우마에 갇혀 히키코모리가 되게 만들었는데 너 자신을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 희생? 역겹다. 희생이라고 말하는 너의 입은 더럽다.”(64쪽)
그래서 이제는 ‘피해자와 희생자’에 대해 열공 모드로 들어간다. “교수는 자신이 ‘위안부’를 무의식적으로 희생자라고 부른 데에 그런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문제가 어떻게든 끝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담론을 지식 상품으로 향유하면서, 소비를 완료해서 진열장에 넣어두고 싶은, 사유화된 지식 상품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근원적으로 자기만족을 위해 희생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었다. 한 번도 피해자의 심장에 들어가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면서 정의로운 척 ‘위안부’ 담론에 관심을 표명하는 지식인인 척했던 것이었다.”(102쪽)
혜린이가 말했다. “대화가 조금만 길어지면 교수님은 베이스가 드러나요. 이상한 걸 못 느끼시죠. 그렇게 말하는 논리를 가진 것이 교수님의 포지션이에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냐?” “생리통, 출산을 얘기하시면서 약을 만들어주는 사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그게 남자라고 박힌 거죠. 우월한 존재라고 박힌 거죠. 여성주체가 느끼는 고통이라는 걸 모르잖아요! 그 논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유치하지 않으세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거예요. 남성도 페미니즘을 잘 말할 수 있지만 교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생리통을 이야기했더니 곧장 약을 말하잖아요. 저는 아픔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뜯어고쳐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정말. 제 말에 동의하고 인정한다면 먼저 고통을 생각하셔야 해요.”(215쪽)
교수는 척하지 않는 삶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216쪽)
한겨레와의 인터뷰 기사를 베껴보자.(“중년 지식인 남성의 페미니즘 입문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2416.html#csidx8996f99f344645e9e0c50589f2b6c4c)
소설 제목은 “2020년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 앞에 선 남성의 포지션”을 가리킨다고 작가는 말했다. “여성운동을 통해서 서사물 속 여성 인물들은 놀라워하고 무서워하는 존재에서 행동하는 존재로 달라지죠. 지금 한국의 남성들을, 달라지기 직전의 단계로서 ‘놀라거나 무서워하는’ 단계로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되어보기’ ‘공감하기’ ‘물어보기’,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어요. 이제 알았으니 실천해야죠.”
정리하자면?
척하지 않는 삶. 어떻게 해야 할까?
‘되어보기’ ‘공감하기’ ‘물어보기’, 즉 실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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