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0-29 14:56
[154호] 여는 글 - “살아남자”와 “함께 살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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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자”와 “함께 살자”

이선이

*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날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대한 것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가 될 수도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습니다. 추석 연휴가 너무 길었으니까요. 그러다가 1화를 보고 나서 “오호?” 하면서 내가 오늘 밤을 새우겠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어릴 때 친구들과 “금 밟으면 죽어”, “술래한테 잡히면 죽어” 하면서 게임을 하잖아요? 그 ‘죽어’가 정말 ‘죽어(die)’가 될 때의 공포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완전 제 취향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성기훈이 오일남 할아버지와 불침번을 서면서, 예전에 자신이 동료들과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잘못은 경영진이 했는데 노동자들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이 너무 억울했어요.” 드라마 초반 성기훈의 이력서에는 ‘드래곤 모터스 조립팀 10년 근무’라는 내용이 나왔었죠. 맞습니다. 주인공 성기훈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오징어게임’을 정주행하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오징어 게임’에는 이주노동자도 나오고, 탈북민도 나오고, 조폭도 나오고, 엘리트도 나오는데, 무슨 이유로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최후의 1인으로 하였을까?

그 후부터는 ‘오징어게임’이 ‘공정함’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게임의 진행자는 말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게임에 참여해서 이기는 사람이 상금을 가져가는 것, 얼마나 공정합니까?” 그래요. 456명의 참가자는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규칙에 따라 게임을 참여합니다. 규칙대로 하지 못하면 ‘탈락’이지만, 규칙대로 게임을 통과하면 456억 원의 상금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됩니다. 게임의 스탭과 참가자가 담합해서 다음 게임이 무엇인지 몰래 알려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주최측은 “게임을 공정하게 진행하지 못했다.”면서 너무나 정중하게 사과합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공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오징어게임’ 그 자체입니다. 주최 측은 맨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탈락’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가 2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지요.
우리나라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전혀 알지 못하는 탈북민이나 이주노동자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게임에 참여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물리적 힘이 약한 노인이나 여성들에게 ‘줄다리기’를 하게 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이긴 사람이 상금을 전부 가져가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게임의 룰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은 이미 ‘게임의 룰’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든 게임에서 이겨서 상금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내가 힘들게 쟁취한 상금을 왜 탈락자들과 나눠야 하냐고 묻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승자가 그 결과를 독점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이지요. 마치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정규직’은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으니 비정규직보다 몇 배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 전환이나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왜 노력도 없이 날로 먹으려고 하니. 억울하면 너도 시험을 통과해. 공정하게”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시험만 통과하면 된다구요? 어떤 청년은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험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지만, 어떤 청년은 매일 알바를 해서 자신의 학원비를 벌어야 하고, 어떤 청년은 시험은커녕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합니다. 이 세 명의 청년이 경쟁하는 것이 정말 ‘공정’한가요? 그런데도 시험을 통과한 정규직은 모든 것을 누리고, 비정규직은 어떤 것도 누리지 못하는 것, 이것은 사실상 ‘처벌’ 아닌가요?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탈락’하면 죽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람들도 사회적으로 ‘죽는’ 것 아닌가요?

‘오징어게임’이 ‘공정함’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왜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최후의 승자일까?”라는 것은 도통 모르겠더군요. 그러다가 주인공 성기훈과 마지막까지 경쟁하는 218번 참가자 ‘상우’를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습니다. 상우는 언뜻 보면 게임이 진행되면서 점점 악해지는 캐릭터입니다. 이주노동자에게 핸드폰도 빌려주고, 차비도 선뜻 내주고, 자신의 빵도 양보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바로 그 이주노동자를 속이지요.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는 기꺼이 나누어주지만, 자신의 이익이 걸려있는 순간 돌변합니다. 상우는 ‘살아남자’는 룰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반면 주인공인 기훈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게임 초반 힘없는 노인을 선뜻 자신의 팀에 받아들이고, 구슬치기 게임을 할 때도 결국은 노인을 자신의 짝으로 선택합니다. 탈북민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도 기훈입니다. 기훈의 룰은 바로 ‘함께 살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투쟁을 할 때 외쳤던 구호입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에서, 그것이 ‘공정하다’고 우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룰’로 살아야 할까요? ‘살아남자’? 아니면 ‘함께 살자’? ‘오징어게임’의 대답은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

※ 이선이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