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2-28 18:19
[170호] 시선 하나 - 승리한 전쟁조차 평화보다 못하다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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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전쟁조차 평화보다 못하다

서민태


지난 7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선고됐다. 학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났고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의 판결이다. 지금까지 한국군이 베트남 주민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우리가 모두 눈 감고 있었다.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마을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의 내용은 이렇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 학살에서 희생된 자의 수가 총 430명이며, 그중 268명은 여성, 109명은 50세에서 80세까지 노인, 82명은 어린이, 7명은 임신부였다. 2명은 산 채로 불에 던져졌으며, 1명은 목이 잘렸고, 1명은 배가 갈라졌으며, 2명은 강간을 당했다. 2가구는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베트남전 중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학살이 일어났던 때는 1968년 2월 12일이다. 시간을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로 돌려 베트남전을 생각해 봤다. 교내 반공 웅변대회에 반 대표로 나간 기억이 생생하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앉았고 연사들은 조례대 위에서 목청을 높였다. 선생님이 내 손에 쥐여준 웅변 원고 중 일부가 생각난다.
“때는 1950년 모두가 잠든 새벽 6시. 호시탐탐 적화야욕으로 물든 이리떼 같은 북한괴뢰군이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와 우리 가족을 죽이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저 바다 건너 베트콩도 북한괴뢰군과 같이 자유 월남인을 살육하였습니다. 이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산당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반공뿐이라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

두 손을 뻗어 과장된 떨림으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다들 운동장이나 강당에서 이런 행사를 경험했으리라. 앉아서 경청하는 모든 아이의 눈빛도 결의에 찼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는 덤이었다. 반공은 그야말로 모든 교육과정 속에 녹아있었다. 당시 모든 학생은 반공에 세뇌당했다. 어린 마음에 만화 주인공 주먹 대장이 되어 김일성을 죽이고 북한 주민들을 구출해야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세뇌 교육을 통해 상대를 악마화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지 무섭다. 죽여도 악마를 죽였고 짐승을 죽였기 때문에 죄의식이 없어진다.

그렇게 왜곡되고 지워진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다시 알려진 것은 1999년 9월 <한겨레21>에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고부터였다.

이 보도 후 월남파병 퇴역 군인 수천 명이 ‘왜곡보도로 인한 명예훼손’이라며 한겨례 신문사 기물을 파손하고 직원들을 폭행하는 등 쑥대밭을 만들었다. 자신들은 베트남에서 ‘베트콩’이라는 악마를 죽인 것이지 양민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2015년 베트남 학살 피해자가 최초로 증언할 때도 행사장 밖에서 참전 군인들은 ‘베트콩’을 외치며 시위를 했다. “한국 정부와 참전 군인이 사실을 인정하고, 당시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저는 8살부터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2022년 8월 당시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여성, 63)이 대한민국 법정에서 한 말이다.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법은 한국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당시 해병 군인들이 원고(응우옌티탄) 집에 가서 실탄과 총으로 위협하고 원고 가족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원고 가족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원고 등은 심각한 총상을 입은 사실을 인정한다. 원고 모친은 외출 중이었으나 군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강제로 한곳으로 모아 총으로 사살한 점도 인정한다.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된다.’

이 판결 후 승소 소식을 들은 응우옌티탄은 “제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인정해준 재판부에게 감사하다. 학살당한 영혼들도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도 기쁘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만행을 저지르는 이 모든 원인은 전쟁이다. 우리도 지금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응우옌티탄이 생겨날지 알기에 우리는 두렵다. 전쟁은 그 어떤 말로도 미화되지 않는다.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넵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승리한 전쟁조차 평화보다 못하다.”

※ 서민태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이며,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