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6-03 17:58
[161호] 여는 글 - 그냥 걸었어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3,089  

그냥 걸었어

오문완


지방선거가, 그야말로, 코앞입니다. 이런저런 소문도 들리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도 할 수 없이 듣게 되고, 참 어수선한 나날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도 가시지 않은 터라 더더욱 피곤한 나날입니다. 이럴 때 청량제는 멍 때리기! 물멍도 좋고 불멍도 좋고, 그(냥)멍도 좋은데 걷는 멍도 좋습니다. 그냥 걸었어, 라는 말, 좋죠?! 마침 연대에서 달마다 해파랑길 걷기를 하고 있어 멍 때리기 좋은 기회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권합니다.

마침 이번 소식지에는 윤경일 회원이 <5월의 서생바닷가 해물라면 끓이기 작전>이라는 글을 싣네요. 슬쩍 훔쳐보니, 이분은 걷는 데는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뭔가” “기여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걷는 회원들을 위해 라면을 끓이게 되었다는 후일담이군요. 그것도 (진짜) 해물 라면을. 그리고 세상사 다 그렇듯이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한몫을 했습니다. 이세호, 한주희 두 회원께 박수 짝짝짝!

라면. 「명사」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 가루 수프를 따로 넣는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네이버 사전) 다음 사전은 “가루 수프를 따로 넣는”다는 문구는 뺐군요. 김진해 교수는 국가가 말을 통제하는(좋은 말로는 ‘통합’일까요?) 것에 (거의)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데…….(말줄임표 대신, 하고 싶은 말씀은 각자 해보시기 바랍니다.) [‘연애’ 하면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이라고 규정짓고 마는데,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 상태”(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신메이카이 국어사전》)라는 상상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얘기.]
라면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입니다. 이분 산문집 제목이 아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일 정도니까요.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

너무 센치한가요? 그래도 (진짜) 해물 라면, 군침이 돌겠지요. 걷기를 하면 이런 즐거움도 뒤따른다는 (아주 좋은) 정보를 알려드리려고 좀 긴 얘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 L'invitation au voyage는 ‘여행으로의 초대’라고도 번역하고(김인환), ‘여행에의 초대’라고도 번역합니다(황현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이 초대를 패러디해서 저는 회원 여러분을 ‘길 위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산다는 게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얘기만이 아니라는 건 이런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현대문학, 9쪽). :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삶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냥 걸었어> 들려드릴게요.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해서
오랫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데
울적해 노래도 불렀어 저절로 눈물이 흐르데
너도 내 모습을 보았다면 바보라고 했을 거야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 오문완 님은 울산대학교 법학과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