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성별구분을 없애면?
이엪지
안녕하세요 여러분, 다짜고짜 죄송하지만 잠시 눈을 감고 ‘공중화장실’의 모습을 떠올려 보시겠어요? 아마 남자와 여자,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화장실이 떠오르실 텐데요. 이 성별 구분을 없애면 어떨까요? 그냥 남녀 공용 화장실이 되는 걸까요? 사실 저는 최근에 너무 좋은 기회로 모두의 화장실에 대한 강연을 듣고, 모두의 화장실 캠페인을 오랜 시간 진행해온 한국다양성연구소의 김지학 소장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고, 진행하고 강연까지 듣는 과정에서 ‘화장실’이라는 공간에 대해 그동안 모르는 게 많았다는 걸 깨달았는데요. 오늘은 화장실 칸칸에 감쪽같이 숨어있던 차별을 함께 찾아봐요.
# 모두의 화장실? 성중립 화장실?
‘모두의 화장실’이란 키가 작은 사람, 성별이 다른 보호자와 함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장애인,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 화장실을 이용하는 장애인,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성소수자, 월경컵을 이용하는 여성 등 모든 사람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말해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공간을 넓히고 손잡이나 세면대를 두는 등 배리어를 없앤 화장실이죠. 비슷한 말로 자주 쓰이는 ‘성중립 화장실’은 단순히 화장실을 남과 여 2개의 성별로 구분하지 않는 곳인데, 모두의 화장실 내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어요.
# 화장실은 누가 사회의 주인인지 보여주는 장소
1960년대 NASA에서 최초로 일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피겨스’에는, 흑인 여성인 캐서린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계속해서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여성 화장실’을 가야 하기 때문이죠. 캐서린은 유능한 인재이지만, 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탓에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기도 어려웠어요. 너무 옛날 얘기 같나요? 그렇다면 지금도 여성 화장실이 없어서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요?
경찰, 버스 운전기사, 자동차 공장이나 건설 현장의 노동자… 이들을 상상하면 대부분 ‘남성’으로 그려지죠. 이런 직종의 경우 사무실에 여성 화장실이 없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2019년 민주노총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55.1%의 가맹조직 현장에 여성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해요. 현대자동차 공장의 경우 노조가 여성 조합원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면, 아직도 건의사항의 절반이 화장실과 탈의실 문제라고 합니다.
# 모두의 화장실이 지금 당장 필요한 이유
흑인, 여성, 장애인 말고도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성소수자일 거예요.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보는 논바이너리를 포함한 트랜스젠더와, 남녀 성기를 모두 갖고 있거나 외부성기와 염색체가 일치하지 않는 간성이 대표적인데요. 사회가 정한 성이분법 시스템에 나를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두 개의 화장실 문 앞에서 매번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쪽에 들어가든 외모로 판단 받고 신고 등의 위협을 당할 수 있거든요. 실제로 많은 트랜스젠더가 물을 잘 마시지 않고 화장실을 참는 게 습관화되어 방광염을 앓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이렇듯 화장실은 계속 누군가를 배제해왔어요.
모두의 화장실이 성소수자만을 위한 장소라는 오해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위에서 모두의 화장실의 정의를 설명할 때 잠깐 언급했듯이, 성별이 다른 보호자와 함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어린이나,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 화장실을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도 큰 도움이 돼요. 그 뿐일까요? 화장실 사용을 주저하거나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도 종종 겪는 일이에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하거나 좁아서 힘들었던 경험, 생리컵이나 탐폰을 사용할 때 세면대가 없어서 불편했던 경험 등이 그렇죠. 위에서 말했듯이 화장실은 그 사회의 주인을 보여주는 장소예요. 따라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그건 알겠는데, 걱정도 돼
걱정1. 성범죄가 증가하지 않을까?
모두의 화장실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성범죄 증가 우려’인 것 같아요. 이에 대한 김지학 소장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여성이 화장실에서 안전하지 못한 이유는 그냥 이 사회에서 여성이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여성이 일터에서도, 대중교통에서도, 공중화장실에서도 어디서도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한 거지, 화장실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거죠. 실제로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함으로 인해 성범죄가 증가했다는 조사 결과는 어디에도 없고, 국내 대학 최
초로 모두의 화장실을 설치한 성공회대학교는 매달 불법촬영 점검을 하는데 아직까지 적발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해요.
이와 비슷한 우려로,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남성으로 지정되었으나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가 여성인권을 위협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그럼 성별을 더 확고하게 둘로 구분 지으면 여성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사회가 주민등록번호, 의류, 화장실 등등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사람을 남녀로 나누고 있지만 이것이 여성의 안전을 담보하지는 않았어요. 트랜스젠더 인권과 여성 인권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함께 걱정하고 고민하면 더욱 잘 해결될 문제죠.
걱정2. 비용, 공간 문제는 어떻게 해?
이건 사실 저의 우려이기도 했어요. 현실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고 공간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걱정됐거든요. 이에 대해 김지학 소장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 효율과 속도, 자본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계속 누군가를 배제해왔다고 말했어요. ‘우리 동네에 장애인 얼마 있지도 않은데 장애인 주차장이 필요해?’ ‘우리 회사엔 여자도 별로 없는데 여자 화장실이 필요해?’라는 식으로요. 때문에 사람, 존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필요한 거죠. 사실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지금 있는 화장실을 다 없애고 모두의 화장실로 바꾸자’는 말은 아니에요. ‘건물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1층에 모두의 화장실 1개 정도는 만들자’는 것에 가깝죠. 이미 지어진 건물 1층에 성별이 구분되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이 있다면, 조금 개선해서 모두의 화장실 두 칸으로 만드는 등,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존재해요.
“설득하려고 만나 뵌 분들은 모두 오해나 소문이나 거짓 정보 같은 것들 때문에 반대하는 분들이었어요. 그게 얘기가 잘 되면서 설득이 됐죠. 아직도 학교에는 모두의 화장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가진 분들이 있겠지만, 그분들과도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제6대 인권위원회 위원장 이훈 : “설득하려고 만나 뵌 분들은 모두 오해나 소문이나 거짓 정보 같은 것들 때문에 반대하는 분들이었어요. 그게 얘기가 잘 되면서 설득이 됐죠. 아직도 학교에는 모두의 화장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가진 분들이 있겠지만, 그분들과도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 더 많은 존재와 함께하기 위해
이엪지가 말하는 비거니즘은 ‘동물권’이나 ‘채식’에 한정되지 않아요.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이엪지의 비거니즘이죠.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가 있기 전까지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아주 차별적이라는 생각을 잘 못한 거 같아요. 비거니즘에 대해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무지한 영역이 계속 발견되는 걸 보면, 아직도 저는 한참 멀은 것만 같아 숙연해지기도 해요. 혹시 화장실 말고도 구조적인 차별이 드러나는 공간이 또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발견한다면 아래 댓글을 통해 언제든 이엪지로 제보해 주시기 바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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