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8-31 15:43
[176호] 인권 포커스 Ⅰ - 분노의 범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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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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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범죄학
최정학
‘분노의 범죄학’이라는 것이 있다. 일찍이 수십 년 전,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Merto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풍요를 보면서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물질적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제시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다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합법적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수단, 즉 범죄를 저지르게 할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사회가 제시하는 목표와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현실 사이의 갈등을 머튼은 ‘긴장’이라고 불렀거니와, 이러한 긴장이 일상화된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긴장의 범죄학’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분노의 범죄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장밋빛 환상과 열악한 현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은 만성적인 긴장을 넘어 좌절과 우울,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쌓이게 되고, 마침내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과 같은 범죄행위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개인이 느끼는 분노는 반드시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것만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존감의 상처, 즉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하는 것과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또 만약 이 사회가 나름대로 공평한 경쟁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실패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은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택시의 불친절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택시요금이 지나치게 낮다거나 운전기사들이 과도하게 오랜 시간 동안 노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인 문제들은 결국 이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쌓이게 된다. 피곤하고 힘든데 웃어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웃기는커녕 작은 말 한마디에도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어디 택시뿐인가. 새벽부터 밤까지 오직 시험만을 생각해야 하는 학교에서, 아무리 갖은 방법을 써 보아도 계속해서 탈락하는 입사 면접에서, 분명히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차별과 해고의 불안에 늘 시달려야 하는 비정규직의 노동 현실에서, 퇴직 후 느껴야 하는 경제적 곤궁과 가족 간의 갈등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한다. 분노는 때로 적당한 정도를 넘어 주위의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며,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는 냉정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의 범죄율지수는 그러나,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다. 범죄율지수는 보통 인구 10만 명당 범죄발생 건수로 측정하는데 한국의 경우 대개 3000건 정도로 북유럽이나 서유럽에 비하면 다소
높지만, 일반적으로 치안이 불안하다고 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아시아의 범죄율이 전반적으로 낮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관의 권력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준법의식이 잘 발달한 것이 주요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천년도 더 넘게 개인보다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유학의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어온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나라에서 정한 법은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라는 잠재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분노의 범죄학’의 설명이 틀린 것일까. 그러나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이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심을 즐기려는 듯한 ‘살인 예고’를 보면, 이제 우리 사회도 본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방 이후 진행된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이기주의에 가까운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팽배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 것이었다. 이에 더해 1990년대 말 몰아닥친 국가적인 경제위기는 강제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와 소외 계층의 극단적 불안이라는 폐해를 우리 사회에 안겨주었다. 한 편에서는 주식과 부동산, 각종 금융 투기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직장과 주거의 불안으로 삶의 위기를 맞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노년층은 노년층대로 여생을 걱정해야 하고, 청년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좁은 방에서 홀로 게임에 몰두하기 일쑤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제 어디에선가 강렬한 분노로 표출된다. 때로는 그것이 남을 향하기도 하고 또는 가족이나 자신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폭력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은 오랫동안 쌓인 마음속의 분노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정신이상자라거나 성격장애자(사이코패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때로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드러내지 않는가? 지독하리만큼 잔혹하게 사람을 살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돈을 챙기는 액션 영화에 통쾌함을 느끼거나 무감각하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정신이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어 평생 계속되는 치열한 경쟁은 친구와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는 것을 당연한 일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기게 하고, 그렇게 성공(?)한 일부의 사람들은 힘겨운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다수의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너무나 괴롭고 비참한 삶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은 때로 자신의 분노를 공격적으로 드러내는데, 사회는 다시 이들에게 ‘정신이상 범죄인’이라는 낙인을 씌워 오랫동안 구금하고 감시한다. 안타깝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많지 않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이 사회에 적응하여 비인간적인 삶을 살거나,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거나 아니면 주류로부터 따돌림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저항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느 쪽이나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 이 글의 전반부는 2017. 8월 인권연대의 <수요산책>이라는 코너에 실린 내용을 전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https://hrights.or.kr/susan/?pageid=2&mod=document&keyword=%EC%B5%9C%EC%A0%95%ED%95%99&uid=6054 (2023. 8. 22, 최후 방문)
※ 최정학 님은 울산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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