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3-01 16:09
[170호] 여는글 - ‘파송송 계란 탁!’ 라면이 아니어도 좋다!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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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송 계란 탁!’ 라면이 아니어도 좋다!
- 아이들에 대한 존중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존중이다 -

신강협


큰아이가 대뜸 ‘아부지! 라면 하나 끓여 줄까요?’라고 묻는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아이는 나의 불안함을 느꼈는지 ‘나도 라면 끓일 줄 알아!’라고 먼저 답을 내놓는다. 평상시 창문을 닫아놓으라면 바깥 창문은 놔두고 안쪽 창문만 닫아놓고, TV 앞 빈 과자 봉지 치우라고 하면 동생이 먹은 과자 봉지는 골라서 그냥 놔두고 자기가 먹은 것만 겨우 쓰레기봉투 언저리에 올려놓은 아이이다. 그리고 귀찮은 것은 아빠를 부려먹을 줄 아는 영악한 아이이기도 하다. 그런 아이가 대뜸 라면을 끓여준다니 ‘이 아니 반가울 수가 있을까?’ 귀찮다고 짜증내며 말을 도로 주워 담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는데,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다가 학생인권 분야에서 학생들의 민주주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학생들에 대한 시민교육이 정말 절실하다는 데에 진행자와 필자는 크게 공감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필자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대해 언급하였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과거 독일이 민주주의 선거제도로 선출한 지도자 히틀러와 그 시대의 인물들이 벌인 세계 2차 대전과 유태인 학살 등의 오점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탄생한 것이다. 특히 이 합의는 독일의 미래세대들이 제대로 된 사회교육 즉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다시는 그러한 역사적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강력히 소망하며 만들어진 청소년을 위한 합의된 민주주의 교육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강압적이거나 주입식의 교육을 금지한다. 둘째, 사회(정치와 학계)에서 벌어지는 논쟁도 논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셋째,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점을 논쟁에 참여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방식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념적 설명이 이어지자 진행자는 ‘그게 정론이기는 한데...’ 라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마도 ‘맞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나요?’ 정도의 반문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필자도 약간의 갑갑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 역시 여전히 교육의 성과 즉 결과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좋긴 좋은데,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혼란스러운 내용만 알려주어 오히려 더 분란만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아이가 실제로 배워야 할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자기주장만 강해지는 것은 아닐까?’ 등등 여러 걱정과 우려가 머릿속에서 마구마구 쏟아져 나왔다. 정치에 대한 혐오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고민도 섞여 있었다.

큰아이가 라면을 끓여준 다음 날 내게 라면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 자신이 유튜브와 인터넷에서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얻은 온갖 정보를 쏟아내면서 이렇게 하면 이런 맛이고, 저렇게 하면 요러 저러한 맛이라고 떠들어댄다. 필자가 아는 한, 몇 가지는 엉터리 정보이다. 바로 이때 어른들은 고민에 빠져든다. 저 이야기를 바로잡아 줄까 말까? 일단 필자는 참아보기로 했다. ‘어 그래? 그럼 참 맛있겠다! 그럼 이번에도 라면 하나 끓여주라!’ 그러자 영악하기가 그지없는 녀석이 씨익 음흉한 표정을 짓더니 ‘이번엔 아버님이 하시죠!’란다.
필자가 만약 아이에게 올바른 정보를 가르쳐준다고 아이의 이야기를 막고, 이런저런 바른(?) 이야기를 했다면 아이와의 대화는 어떻게 전개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이는 다음부터 라면에 관한 이야기는 더 찾아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빠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아빠와 대화에서 자신은 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인식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빠는 늘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명확히 알아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득 아이로부터 ‘그냥 아빠가 가르쳐주면 되잖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필자가 아빠 역할을 제대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이 든다.

시시콜콜한 라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모습들을 잘 살펴보면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아주 거창한 원칙이 아니다. ‘라면은 라면 봉지 뒤에 나와 있는 시간과 방식을 잘 외워두기만 하면 잘 끊일 수 있어!’라고만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표준적인 라면을 잘 끓이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입맛과 사람들의 다양한 상상력을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라면의 맛을 자신에 맞게 다양하게 조리하는 방법을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기 생각도 덧붙여 시도 해보기도 하라는 것이 그 합의의 두 번째, 세 번째 원칙이다. 결국, 어른들의 생각대로 살게 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내고, 대화에 참여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초중고 학교를 졸업한 뒤, 이 사회는 결과를 원한다. 그 결과가 학생들의 삶에 반드시는 아니지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부모 세대는 그 결괏값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정말 현실적인 고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할 아이들은 상처받기도 하고 기존의 정보와 기존의 사회에 오롯이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필자도 여전히 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현실적인 걱정이 많다. 그렇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기존의 사회를 한순간에 다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배우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권리가 있다. 어른들이 어느 특정한 시기에 특정 결과만 바라보지 말고, 그 과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의적으로 만드는 가장 훌륭한 교육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라면에 관해 이것저것 찾아보고 신나게 설명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지에 대한 자존감이 그득했다. 파 송송 썰어 넣고, 계란 탁 풀어놓은 라면은 아니지만, 아이가 끓여준 라면은 참 기뻤다!

# 위 글은 [제주의소리] '인권왓 칼럼' 게재글로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들과 함께 읽기를 바라며 싣습니다.

※ 신강협 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회원이며,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입니다.